여론광장
후손들이 일컫는 세소칭(世所稱) 사육신(死六臣)은 후손들이 날조(捏造)한 역사 왜곡
 김민수
 2014-05-06 22:19:09  |   조회: 6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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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이 일컫는 세소칭(世所稱) 사육신(死六臣)은 후손들이 날조(捏造)한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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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 4월 25일 세종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김문기(金文起)를 보내어 태조실록(太祖實錄)·공정실록(恭靖實錄)·태종실록(太宗實錄)을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봉안(奉安)하였다.1437년 2월 10일 사간원 좌헌납(左獻納) 김문기(金文起)가 아뢰기를, “근일에 창덕궁(昌德宮) 서쪽에 있는 예전의 이조(吏曹)를 수리하여 장차 해동청골(海東靑鶻)인 해청(海靑)을 길러서 더위를 피하게 한다고 합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해청을 잡아 기르는 것은 본래 명국(明國) 황제(皇帝)에게 진헌(進獻)을 위한 것인데, 이제는 이미 이를 정지하였고, 또 흉년으로 비용을 절약하는 때를 당하여 하나의 새를 위해서 집을 영선 수리하는 것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덕을 닦고 반성하는 뜻이 아니오니 해청을 놓아 버리게 하소서.”하였다. 세종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간쟁(諫諍)을 담당한 간관(諫官)의 말이 옳다. 그러나 해청을 기르는 것이 오늘에 시작한 것이 아니니, 또한 모두 진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성품이 사냥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강무(講武)하는 때를 당하여도 활과 화살을 갖지 아니하고 성색(聲色), 견마(犬馬), 화훼(花卉) 등의 물건도 또한 좋아하지 않으나 이 해청은 준일(俊逸)하고 불범(不凡)하여 보통 매와 달라서 놓는 데도 말달리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보는 데도 눈의 시력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서 나의 말타고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뜻에 꼭 맞으므로 일찍이 길러서 하나의 놀이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가지고 놀되 자신이 팔뚝에 받아 본 적은 없다. 근자에 가문의 재앙으로 인하여 매양 스스로 반성하여 지난 가을부터 금년 봄까지 한 번도 교외에 나가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이 것을 아껴서 머물러 기르겠는가. 지금 큰 재앙을 당하였으니 화복(禍福)을 알 수 없으나 혹시 안전하다면 나이도 늙지 않았고, 또한 선도 배우지 않았으니 반드시 사냥하는 일을 할 터인데, 지금 곧 놓아버리고 뒤에 다시 구하면 불가한 일이 아닌가. 또 그 기르는 데에 베 한 자나 쌀 한 말도 들지 않으니 경비에도 손실이 없을 것이다.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인 언관(言官)이 만일 매라면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가하지마는 어찌 유독 해청(海靑)만 불가하다고 하는가. 기르는 것이 다른 매와 다르지 않은데 지금 가리켜 불가하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신하로서도 오히려 매를 기르는 사람이 많은데, 임금만은 새 한 마리도 기를 수 없는가.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경들도 역시 불가하다고 말하면 내가 응방(鷹坊)을 파하겠다.”하였다. 승지들이 아뢰기를, “간관의 말이 잘못입니다. 대체를 알지 못하여 그 말이 오활(迂闊)하니 책할 것도 없습니다. 임금이 이 것을 기르는 것이 불가하다 하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노시겠습니까. 기르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하니, 이에 세종이 김문기에게 하교하기를, “말한 것이 진실로 옳으니 내가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해청을 기르는 것이 이제부터도 아니요, 특히 진헌 때문도 아니다. 그 기르는 것이 베 한 자나 쌀 한 말의 비용도 들지 않으니 만일 매라는 것은 모두 길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가하지마는 유독 해청을 지적하여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이 해청을 불가하다고 하면 마땅히 선법(禪法)을 구하여야 하겠는가. 만일 선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 해청으로 하루의 희롱거리를 삼는 것이 가하지 않겠는가.”하였다. 김문기가 아뢰기를, “해청은 진귀한 새이고 특이한 산물이니 원래 길러서는 안 되고, 다른 무익한 물건들도 기를 것이 아닙니다. 또 이미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이 같은 쓸데없는 물건을 어찌 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먹는 물건도 또한 말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또 신이 매를 모두 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해청은 잡는 데에 상을 주어야 하고, 기르는 데는 땅을 택하여야 되므로 다른 매와 다르오니 기를 것이 못된다고 여겨집니다.”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이 해청은 우리 지경에서 많이 산출되는 것이니 진귀한 새와 기이한 구경거리로서 앵무새나 공작새 같은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하였다.







3월 22일 사헌(司憲) 지평(持平) 정지하(鄭之夏)·좌헌납(左獻納) 김문기(金文起) 등이 아뢰기를, “신효창(申孝昌)의 죄는 일이 반역을 범하였으니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데 그 생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 것은 다행 중의 다행입니다. 이제 도리어 특별한 은총을 입어서 도로 직첩을 받으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또 신효창이 왕실과 혼인의 관계를 맺었으니 직첩을 도로 주는 것이 어찌 물의(物議)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의 죄가 크니 상례(常例)로 의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즉위하던 이듬해에 그 직첩을 거두었다고 하시오나 당시의 나라의 대사는 태종 전하께서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어찌 태종 전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문득 이 사람을 죄주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것은 실상 태종 전하께서 하신 일이니 어찌 가볍게 그 일을 바꿀 수 있습니까. 전 날 신효창의 직첩을 거둘 때에 정용수(鄭龍壽)도 역시 같은 죄로 개국 공신의 녹권(錄券)에서 삭제하고 그 작첩(爵牒)을 거두어 일생을 마쳤는데, 어찌 유독 이 사람에게만 너그럽게 용서하십니까. 명령을 거두시어 신민의 바람을 위로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24일 세종이 말하기를, “신효창과 한 때의 사람으로서 신효창보다 중한 자가 많은데, 오직 신효창에게만 이렇게 심하게 하니 불가하지 않은가. 전일에는 신효창의 죄가 이렇게 중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비록 친구의 사이일지라도 범사를 근거없이 추측하여 말할 수 없거늘 하물며 임금의 앞에서이겠는가.”하였다. 좌헌납(左獻納) 김문기가 대답하기를, “신 등의 말이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닙니다. 전일에 신효창을 죄주기를 청한 장문(狀文)에 죄명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는데, 신 등이 그 것을 보고 죄명을 열거하여 써서 장을 올린 것입니다.”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신효창이 죄가 참으로 그렇다면, 신효창의 자손으로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을 받은 자가 몇 사람인가. 내가 직첩을 돌려주는 것은 신효창에게 사(私)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직첩을 돌려줄만하기 때문이다.”하니 김문기가 대답하기를, “신효창의 자손에게 금고(禁錮)의 법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고신(告身)을 내준 것이지마는 신효창의 직첩은 이미 회수하였으니 어찌 돌려줄 수가 있겠습니까.”하였다.







1444년 7월 1일 봉상시 윤(奉常寺 尹) 김문기(金文起)를 평안도에 보내어 산양회(山羊會)에 도적이 들어온 상황과 지위원군사(知渭原郡事) 정윤덕(鄭允德)이 산양회 만호(萬戶) 등과 군기(軍機)를 잃어 버린 죄를 핵실하게 하고, 이어 김문기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금년에 적(賊)이 두 번이나 침입하였는데 한 번도 그들과 싸우지 못한 것은 매우 한스럽다. 그러나, 이 번에도 적이 상륙(上陸)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도주(逃走)하였으니, 전 번의 일에 비교하면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 적정(賊情)을 정탐한 사람들의 공로의 등급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7월 18일 평안도 경차관(敬差官) 김문기(金文起)가 치계(馳啓)하기를, “신(臣)이 이산(理山)에 이르러 친히 접전(接戰)한 곳을 살펴보니, 그 군사를 숨겨 두었던 상태가 매우 소활(踈闊)한 구석이 많았으며, 우리 군대가 웅거하여 있던 곳은 높고 험하거나 초목이 무성한 곳이 아니어서 싸움하기에 매우 편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변장(邊將)이 또 적(賊)을 유인하여 육지 깊숙이 끌어들이지 않고 적이 겨우 육지에 오르자마자 먼저 이쪽에서 급히 공격하였기 때문에 섬멸시키지 못하고 적으로 하여금 도망쳐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또 복병(伏兵)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화포(火砲)를 방사(放射)하여서 모두 군기(軍機)를 잃고 다 무찔러 죽이거나 잡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적선(賊船) 4척이 침몰하고 적병도 죽었으며, 나머지 적병들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패하여 달아났으니, 적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공로가 꽤 현저합니다. 그러나, 공(功)과 과실(過失)이 서로 같으므로 그들의 공로를 사정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엎드려 상지(上旨)를 기다립니다.”고 하니, 유서(諭書)를 내려 회답하기를, “적을 방어한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賞罰)은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정하겠으니, 각 사람의 공과 과실을 자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1445년 4월 23일 세종이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가 추천한 계모 상(繼母 喪)을 만나 옥천(沃川)에 있는 전 수 봉상시 윤(守 奉常寺 尹) 김문기(金文起)를 3군(三軍) 도진무(都鎭撫)로 삼으니, 김문기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의 어미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이 13세 때부터 계모에게 자랐사오니 은의(恩義)가 지극히 중하옵니다. 신은 독자이므로 상사(喪事)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먼 지방인 하방(遐方)으로 부임(赴任)하면 실로 마음이 아프고 민망스러운 통민(痛悶)하며 신은 본래 열약(劣弱)하여 군대(軍隊), 전투(戰鬪), 무예(武藝)에 관한 일인 무사(武事)에 관심이 없는 불한(不閑)하오니, 신의 임명을 바꾸기를 요청하는 걸체(乞遞)바랍니다.”하였으나 세종은 김문기의 3군(三軍) 도진무(都鎭撫) 체임(遞任) 요청을 윤허하지 않는 불윤(不允)하였다. 1453년 9월 13일 단종이 김문기(金文起)를 형조 참판(刑曹 參判)으로 삼았다. 1455년 윤6월 28일 세조가 이호성(李好誠)·유응부(兪應孚)·안숭직(安崇直)·우효강(禹孝剛)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7월 20일 함길도 도절제사 김문기(金文起)를 도진무(都鎭撫) 겸 공조 판서(工曹 判書)로 이변(李邊)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성승(成勝)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1456년 2월 19일 박쟁(朴崝)·이흥덕(李興德)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삼았다. 3월 8일 박중림(朴仲林)·성승(成勝)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조완벽(趙完璧)·한서룡(韓瑞龍)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단종 복위 모의 거사 당시 유응부(兪應孚)는 여러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중 1인이었고 모의 또는 동기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으며 부총관이 없었는데 정조조 장릉 배식단의 부총관은 무엇인가? 또한 성승(成勝)은 도진무가 아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겸 별운검이었는데 정조조 장릉 배식단의 도총관은 무엇인가? 유응부를 부총관으로 날조하면서 성승을 도총관으로 도진무(都鎭撫) 김문기를 이조 판서,3중신으로 왕자가 아닌 3중신 이양을 종영으로 날조한 것이다)







1456년 6월 2일 성균 사예(成均 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뢰는 밀계(密啓)할 것이 있습니다.”하므로,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사람을 시켜서 신(김질)을 보자고 청하기에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上王) 단종과 세자(世子:덕종)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정창손)을 타일러 보라.’ 하므로, 신(김질)이 말하기를, ‘우리 장인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우의정(右議政)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으니,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하여 상왕(上王)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 하였습니다. 세조가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하고, 급하게 승지(承旨)들을 불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우부승지 조석문(曹錫文)·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과 성삼문(成三問)이 입시(入侍)하였다.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邦霖)에게 명하여 성삼문을 잡아 끌어내어 꿇어앉힌 다음에 묻기를,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하니, 성삼문(成三問)이 대답하기를, “신은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중림(朴仲林)·박쟁(朴崝)·유응부와 같이 모의하였습니다.”하였다. (중추원 소속 많은 무반들 중 몇 명과 정창손, 김질도 단종 복위 모의를 알았으나 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세조실록을 상고(詳考)하지 않은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은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며 평안도에 좌천된 유응부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왜곡하고 아우 유응신을 잘못 기술한 육신전(六臣傳)은 소설이다)







세조가 명하여 하위지를 잡아들이게 하고 묻기를, “성삼문이 너와 함께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성변(星變)의 일이다.”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변을 알게 되었습니다.”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성변의 일로 인하여 모반(謀反)을 꾀하는 불궤(不軌)한 일을 같이 공모했느냐?”하였으나, 하위지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이개에게 묻기를,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하니, 이개는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鞫問)함이 마땅하나, 유사(有司)가 있으니, 그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하였다. 공조 참의(工曹 參議) 이휘(李徽)는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원(政院)에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마침 권자신(權自愼)·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자네는 시사(時事)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좌중을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잘 생각하여 보게나.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휘(李徽))이 묻기를,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 등도 역시 알고 있다.’ 하기에, 신이 곧 먼저 나와서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인 6신(六臣)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는 친국하였다. (단종 복위 모의를 알았으나 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6신(六臣)이 아니다. 창모,선동한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김문기(金文起)·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이 사육신(死六臣)이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한편이 되는 같은 무리에 딸린 당류(黨類), 도당(徒黨)인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박중림(朴仲林)·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입니다.”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하였다. 그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첨지중추원사 박쟁·동지중추원사 유응부가 별운검(別雲劍)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하였다. 그 시기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별운검(別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어전(御殿)에서는 2품 이상 무반(武班)이 긴 운검(雲劍)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 이 날 세조가 노산군과 함께 대전에 나가게 되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과 첨지중추원사 박쟁이 양 운검(兩 雲劍)이 되었는데, 세조가 전내(殿內)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別雲劍)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이 정원(政院)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세조가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전내(殿內)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별운검이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후일에 임금이 백성이 농사짓는 가색(稼穡)을 살피는 관가(觀稼)할 때 노상(路上)에서 거사(擧事)하고자 하였습니다.”하였다. (세조실록에 기사가 없는 유응부의 아우 유응신과 평안도에 좌천된 유응부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잘못 기술한 육신전(六臣傳),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은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 정조실록에 유응부를 부총관으로 날조하면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成勝)을 도총관으로 날조한 기사가 있는데 단종 복위 모의 당시에는 도진무(都鎭撫)가 있었다.)







1791년 2월 21일 정조가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정조가 전교하기를 “안평대군·금성대군·한남군·영풍군·화의군인 5종영(五宗英) ·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인 4의척(四懿戚) · 김종서·황보 인·정분인 3상신(三相臣) · 이양(李穰)·조극관·민신인 3중신(三重臣) · 성승(成勝)·박쟁(朴崝)인 양 운검(兩 雲劒) 및 6신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하였다. 1466년(세조 12) 1월 15일 5위 진무소를 5위 도총부로 도진무(都鎭撫)를 도총관(都摠管)으로 개칭하였다. 정단(正壇)에 배식(配食)한 32인 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도진무(都鎭撫)이며 양 운검(兩 雲劒)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成勝)·박쟁(朴崝)이다. 아우 유응신(兪應信)과 유사수(兪思守)가 연좌되어 죽었다는 실록 기사가 없으므로 정조조 별단(別壇)에 연좌되어 죽은 유사수(兪思守)를 배식(配食)하였다는 정조실록 기사는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한편이 되는 같은 무리에 딸린 당류(黨類), 도당(徒黨)인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당여(黨與)를 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단종 복위를 모의한 당여(黨與)를 토설(吐說)한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起)만이 단종 복위를 모의한 당여(黨與)를 진술한 공초(供招)에 단종 복위를 모의한 당여(黨與)를 말하지 않은 불복(不服)하였고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좌참찬 강맹경(姜孟卿)·좌찬성 윤사로(尹師路)·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형조 판서 박중손(朴仲孫)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 提調)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류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 자문이사(自刎而死)하였다.(정조실록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成勝)이 도총관으로 추증되었는데 단종 복위 모의 당시 도진무(都鎭撫)가 있었다.)







1456년 6월 6일 이개(李塏)의 매부(妹夫)로 모반에 참여한 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 副修撰) 허조(許慥)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 자문이사(自刎而死)하였다. 8도(八道)의 관찰사(觀察使)·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에게 유시하기를, “근일에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박중림(朴仲林)·권자신(權自愼)·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윤영손(尹令孫)·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꾀하였으나, 다행하게도 천지 신명(天地神明)과 태묘·사직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흉포한 역모가 드러나서 그 죄상을 다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소민(小民)들이 두려워할까 염려하니, 경 등은 이 뜻을 선유(宣諭)하여 경동(驚動)하지 말게 하라.”하였다. 6월 7일 박팽년(朴彭年)이 이미 공초(供招)에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는 옥사(獄死)하였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팽년·류성원(柳誠源)·허조(許慥) 등이 지난 해 겨울부터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허조(許慥)·박팽년·김문기의 시체를 거열(車裂)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8도에 전(傳)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하는 적몰(籍沒)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였다.







6월 8일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 提調) 윤사로(尹師路)·강맹경(姜孟卿)·이인손(李仁孫)·신숙주(申叔舟)·성봉조(成奉祖)·박중손(朴仲孫)·어효첨(魚孝瞻)과 승지(承旨)·대간(臺諫) 등을 불러서 입시(入侍)하게 한 다음,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권자신(權自愼)·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윤영손(尹令孫)·송석동(宋石同)·이휘(李徽) 등을 끌어 와서 장(杖)을 때리면서 당여(黨與)를 신문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개·하위지·성삼문·박팽년·김문기·류성원·박중림·허조·성승·박쟁·권자신·송석동·윤영손 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할 것을 꾀하여, 6월 초1일에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아울러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아가지와 불덕은 연좌시키지 말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자를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모녀·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고, 나이 16세 미만인 자는 외방에 보수(保授)하였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안치(安置)시키며,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하고, 드디어 백관(百官)들을 군기감(軍器監) 앞 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이개와 그 당여(黨與)를 환열(轘裂)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유응부는 부모와 아들 3족·처(妻)·조손(祖孫)·형제(兄弟) 유응신(兪應信)·자매(姉妹)가 연좌(緣坐)되었다는 실록 기사가 없는데 1급 난신인가? 정조조 장릉 배식단 배식에 유응부,남효온 후손들의 연좌(緣坐)되지 않은 유사수를 삽입한 것은 역사 날조이다)







성삼문(成三問)은 성격이 출세에 조급하여 스스로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이름은 남의 앞에 있으나 오래도록 제학(提學)과 참의(參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아비 성승(成勝)은 본래 이용(李瑢)과 가까이 지냈는데,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 牧使)로 있을 때 사람을 죽이고 관직이 떨어져 고신(告身)과 과전(科田)을 거두었으나, 이용(李瑢)이 자기 당류(黨類)들에게 말하기를, “성승이 가장 나를 따르고 있다. 만약 변(變)이라도 있게 되면 의당 내 말 앞에 설 사람이다.”하고, 바로 계청(啓請)하여 환급(還給)하였다. 이 말이 남들에게 퍼졌으므로 성삼문이 그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였다. 박팽년은 사위 이전(李瑔)의 연고로 항상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하위지(河緯地)는 일찍이 세조에게 견책을 받았으므로 원한을 품었었고, 이개(李塏)와 류성원(柳誠源)은 품질(品秩)이 낮은 것에 불평 불만하여 진달(進達)하려는 생각에서 마침내 서로 깊이 결탁하여 급급히 왕래하였는데, 정적(情迹)이 이상하여 남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과 족친(族親)이 되었고, 또 친밀히 교제하였는데, 그 때 김문기가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상왕(上王) 단종(端宗) 복위(復位) 거사(擧事)를 모의(謀議)하기를,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영병(領兵)하고 있으니, 단종(端宗) 복위(復位) 거사(擧事)를 거역하는 위거(違拒)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압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하였다.(세조실록을 상고(詳考)하지 않은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은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며 육신전(六臣傳)은 소설)







6월 9일 세조가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지난 번에 이용(李瑢)이 모역(謀逆)할 때, 널리 당파를 심어 중외에 반거(盤據)하였으므로 흉포한 도당이 진실로 많았지만 내가 차마 모조리 처벌하지 못하고 그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문에 부쳤는데, 남은 도당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서로 이어서 난(亂)을 도모하므로 그 때마자 주륙(誅戮)하여 제거하였으나, 근자에 또 여당(餘黨) 이개(李塏)가 흉악한 마음을 품고 감정을 풀고자 하여 난(亂)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그의 도당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박중림(朴仲林)·허조(許慥)·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이 같은 악당으로 서로 선동하였다. 장신(將臣)인 성승(成勝)·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성삼고(成三顧)·유응부(兪應孚) 등과 비밀히 결탁하여 우익(羽翼)을 삼고, 권자신(權自愼)·윤영손(尹令孫)·조청로(趙淸老)·황선보(黃善寶)·최사우(崔斯友)·이호(李昊)·권저(權著)와 연결하여 몰래 궁금(宮禁)에 연통하고,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날짜를 정해 거사(擧事)하여서 장차 과궁(寡躬)을 위해(危害)하고 어린 임금을 옹립하여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흉포한 모략과 간악한 계략을 꾸며 그 죄역(罪逆)이 하늘을 뒤덮었다.”하였다. 신문(訊問)한 문목(問目), 진술한 공초(供招), 최종 판결문인 국안(鞫案),추안(推案)을 명시한 현대의 대법원 판결문과 같은 세조의 교서(敎書)를 보면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 도진무 김문기(金文起)와 별운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成勝)·첨지중추원사 박쟁(朴崝)이 1급 난신(亂臣)임을 알 수 있다.







1511년 3월 14일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이 아뢰기를 “최숙정(崔淑精)·성현(成俔)·조위(曹偉)·유호인(兪好仁)·박은(朴誾)·김맹성(金孟性)·어세겸(魚世謙)·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문장(文章) 유고(遺稿)가 모두 묻히고 없어지는 침민(沈泯)하여 전하지 않으니, 후의 사람들이 무엇으로 문장(文章)의 높음을 알겠습니까? 또 시사(詩詞)는 본래 그 풍요(風謠)를 노래하여 읊은 가영(歌詠)한 것인데 이 것으로 하여 그 풍속의 오융(汚隆)과 정치의 승강(升降)을 알 수 있는 것이니, 크게 정치 체제 치체(治體)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민멸(泯滅)하여 전함이 없게 할 수 없습니다. 위의 몇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선인의 유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니, 청컨대 모아 거두는 수괄(搜括)해서 편집하여 개간(開刊) 전파(傳播)함이 매우 마땅합니다.”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명하여 이 사람들의 문집을 모아 편집하는 수편(搜編)하여 개간하게 하였으니, 다시 명하여 속히 간행하는 속간(速刊)하게 하여야 하겠다.”하였다.







1545(인종 1)년 4월 9일 시강관(侍講官)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이 어둡고 나이 어려 종사(宗社)가 위태로우므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다 세조(世祖)께 돌아가서 즉위하셨으니, 이 것은 종사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마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뒤에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류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 등이 난(亂)을 꾀하다가 주살(誅殺)되었습니다.”하였다. 세조가 친국 후 교서(敎書)에 명시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창모(唱謀) 선동(煽動)한 1급 난신(亂臣)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김문기(金文起)·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이 사육신(死六臣)이다. 3급 난신(亂臣) 유응부(兪應浮)는 세종 재위 중에 첨지중추원사로 있다가 단종 재위 중에는 극변의 경원, 의주, 강계에 좌천되어 있었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하자 동지중추원사로 영전한 친세조파이므로 단종 복위 모의 가능성이 없으며 유응부의 부모,아들인 3족과 아우 유응신(兪應信)이 연좌되었다는 기사도 없어 1급 난신(亂臣)이 아니다.단종실록과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유조(兪造), 남윤종(南潤宗), 성숙(成俶)이 편찬한 세조실록 기사와 배치되는 남효온(1454-1492)이 2살 때인 1456년의 사건인 단종(端宗) 복위(復位) 모의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며 예종조 세조실록 편찬 후인 말년에 출처가 불분명한 풍문을 듣고 쓴 남효온 개인 문집의 소설인 육신전에 근거한 선조조에 좌의정 유홍(兪泓), 동지사(同知事)남세건(南世健) 편수관(編修官) 유강(兪絳)이 편찬한 인종실록,남공철 등이 편찬한 정조실록, 남규희(南奎熙)가 편찬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총독부일지인 이왕가고종실록을 비롯한 실록 기사는 신빙성이 없다.1급 난신(亂臣)은 연좌 범위가 매우 넓고 연좌되지 않은 9족은 모두 극변으로 낙향(연좌되지 않은 9족은 한성을 떠나 숨어 살며 중앙의 고관 벼슬을 할 수 없다)하였는데 세조실록의 세조 친국 추안을 명시한 교서를 부정하고 소설의 내용을 근거로 한 6신(六臣)의 왜곡과 한성과 경기에 사는 유응부 집안 후손에 의해 임의 조성된 6신묘(六臣墓)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1576년 6월 24일 선조가 6신을 왜곡한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을 가져다 보고 나서 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인 3공(三公)을 불러 전교하기를,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을 보니 매우 놀라운 경해(驚駭)하다. 지난 날 세조인 광묘(光廟)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中興)하신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남효온이 어떤 자이길래 감히 문묵(文墨)을 희롱하여 국가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조선국의 죄인이다.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 기록된 내용 가운데 노산군(魯山君)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유년에 출생하여 계유년까지 그의 나이가 13세인데도 16세로 기록하였으며 세조인 광묘(光廟)께서 임신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었는데 여기에는 부음(訃音)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고 기록하였다. 또 하위지(河緯地)가 계유년에 조복(朝服)을 벗고 선산(善山)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광묘께서 즉위하여 교서(敎書)로 불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하위지가 갑술년에 집현전(集賢殿)에서 글을 올린 것은 무엇인가? (유응부의 후손인 선조조 좌의정 유홍(兪泓)이 계획적으로 유응부(兪應孚)를 6신으로 왜곡 기술한 소설 육신전(六臣傳)을 선조가 보게 한 것이다) 6신(六臣)이 충신인가? 몸을 맡겨 임금으로 섬기고서 세조인 광묘(光廟)를 시해(弑害)하려 했으니 이는 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저 6신은 무릎을 꿇고 임금을 섬기다가 꾀를 도모하여 자객(刺客)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이에 의사(義士)로 자처하였으니 마음과 행동이 어긋난 것이다. 이들은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모범이 될 수 없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역적이니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왜곡되고 진실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왜곡되고 허탄함은 진실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가슴아픈 것은 뒷 사람들이 어떻게 그 일의 전말(顚末)을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한 번 그 글을 보고 곧 구실(口實)로 삼는다면 이 글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해치기에 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내가 6신을 왜곡한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우어(偶語)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하였다. (세조실록,선조실록을 보면 사육신은 없으며 6신(六臣)이 있을 뿐이다, 왜곡된 6신(六臣)은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에 근거하여 정조조에 유응부,남효온의 후손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인 3공(三公)이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는 회계(回啓)하기를, “신들이 매우 놀라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분부가 애통하고 간측한 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에 합당한 일입니다. 6신을 왜곡한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의 잘못된 와오(訛誤)와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진실로 성유(聖諭)와 같더라도 여염(閭閻) 사이에 드물게 있는 한유(罕有)한 책이며 또 세월이 오래되어 점차 없어져 가는 인몰(湮沒)하는데 수색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큰 소란이 일어나서 끝내는 이익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요망스러운 책 망서(妄書)를 진실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사람들이 서로 마주 대하며 이야기하는 우어(偶語)하겠습니까? 중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들으면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금령(禁令)을 내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 대하며 이야기하는 우어(偶語)는 저절로 중지될 것입니다.”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우어(偶語)하는 자를 중죄로 다스리려는 것을 반대하니 지금 우선은 마지못하여 따르는 면종(勉從)하겠다.” 하였다. (유응부의 후손인 선조조 좌의정 유홍(兪泓)이 선조가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유응부(兪應孚)를 6신으로 왜곡 기술한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려는 것을 막았다)







1652년 11월 13일 전 판서 조경(趙絅)이 포천(抱川)에서 분부에 응하여 효종에게 상소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충신·열사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포장(褒奬)하고 뛰어남을 정표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고려국의 사절(死節)한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도 다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자손을 거두어 썼으니, 이 것이 어찌 천지의 사(私)가 없는 도량으로 본조나 다른 왕조를 차별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신의 어리석은 마음에 간절한 것은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김문기(金文起)·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 6신(六臣)들이 천명(天命)이 돌아간 것을 모르기는 하였으나 그 섬기는 바를 위하여 죽은 대절(大節)은 뚜렷이 빛나는데 정려하는 은전이 아직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니, 어찌 겨를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1691년 9월 2일 숙종이 노량진(露梁津)을 건너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의 무덤이 길 옆에 있는 것을 보고 그 절의(節義)에 감동하여 특별히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게 명하고 근시(近侍)를 노산 대군(魯山大君)의 묘(墓)에 보내어 제사하게 명하자 판부사(判府事) 김덕원(金德遠)이 말하기를 “노량(露梁) 6신묘(六臣墓)는 예전부터 전하여 오는 유전(流傳)하는 말이 있기는 하나 명백히 의거할 만한 증험인 거증(據證)이 없습니다.”하니 그치게 하는 고침(姑寢)을 명하였다.







1692년 1월 25일 숙종이 뜸으로 치료를 할 때 약방 도제조(藥房 都提調) 김덕원(金德遠)이 아뢴 말에 따라 6신(六臣)들의 관직을 복구하는 고신(告身)을 특별히 이조(吏曹)로 하여금 만들어서 그 자손에게 주도록 하고, 자손이 없는 사람의 것은 서원(書院)에 주어 후세에 전하도록 하되 서원의 액호(額號)를 처음에는 민절사(愍節祠)라고 정했다가 해 조(曹)로 하여금 민절서원(愍節書院)이라고 고치도록 계하(啓下)하였다. 1734년 9월 18일 6신묘(六臣墓)의 영역(塋域)이 허물어지고 표석(標石)이 기울어졌으므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다시 봉축(封築)하게 하였고, 민절사(愍節祠)에 소속된 선척(船隻)으로서 선혜청(宣惠廳)에 이관(移管)된 것을 또한 민절사에 환속(還屬)시키도록 하였다. 1758년 10월 4일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영월(寧越) 장릉(莊陵)의 산불을 방지하기 위하여 능(陵)·원(園)·묘(墓)의 해자(垓子)밖에 있는 초목(草木)을 불살라 버린 화소(火巢) 안에 6신(六臣)의 창절사(彰節祠)가 있는데, 고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이천 부사(伊川 府使) 박태보(朴泰輔)가 힘을 합쳐서 개수(改修)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소 안에 있는 사당을 옮겨서 건립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영조가 하교하여 옮기지 말라고 명하였다. 승지들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지금 예조 판서가 아뢰는 것을 들어보니 단종께서 복위(復位)하신 간지(干支)가 금년 이 달 28일과 같다고 하므로 서글픈 심회(心懷)를 억누르기가 어려워 제문(祭文)을 마땅히 친히 짓고, 대신(大臣)을 보내서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한다. 6신의 창절 서원(彰節書院)이 능침(陵寢) 동구(洞口)에 있다고 하는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수리 보수하도록 하라. 6신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을 증직하도록 하고,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내려 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1778년 3월 3일 정조가 고 판서 김상성(金尙星)에게 문헌(文憲)을, 고 판서 김문기(金文起)에게 충의(忠毅)를, 고 판서 이창수(李昌壽)에게 문헌(文憲)을, 순화군(順和君) 이보(李보)에게 희민(僖敏)을,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에게 효희(孝僖)를, 해안군(海安君) 이억(李億)에게 정의(靖毅)를 증시(贈諡)하였다.







1791년 2월 21일 정조가 전교하기를 “6신은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 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 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를 지나다가 옛 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다. 후손들이 일컫는 세소칭(世所稱) 생육신이나 5종영(五宗英)의 높고 큰 충절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추앙하는 형편이라 누구는 배향하고 누구는 배향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취사 선택해서는 안될 것이니 별도로 예법에는 없지만 예법에 맞는 예를 찾아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하였다. 1791년 2월 21일 정조가 단종(端宗)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세조실록을 상고(詳考)하지 않은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은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며 육신전(六臣傳)은 소설) 정조가 전교하기를 “안평대군·금성대군·한남군·영풍군·화의군 다섯 대군,군 왕자인 5종영(五宗英) ·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인 4의척(四懿戚) · 김종서·황보 인·정분인 3상신(三相臣) · 이양(李穰)·조극관·민신인 3중신(三重臣) · 성승(成勝)·박쟁(朴崝)인 양 운검(兩 雲劒) 및 6신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하였다. 헌납 유악주(兪岳柱), 좌의정(左議政) 유언호(兪彦鎬), 원임 직각 남공철(南公轍), 승지 유한녕(兪漢寧), 대사간 유한모(兪漢謨), 장령 남혜관(南惠寬)이 정단(正壇),별단(別壇)에 배식(配食)할 충신을 의논하여 정조에게 아뢰었다. (정단(正壇)에 배식(配食)한 32인 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진무소(鎭撫所) 도진무(都鎭撫)이며 양 운검(兩 雲劒)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成勝)·박쟁(朴崝)이다. 유사수(兪思守)가 연좌되어 죽었다는 실록 기사가 없으므로 정조조 별단(別壇)에 연좌되어 죽은 유사수(兪思守)를 배식(配食)하였다는 정조실록 기사는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다. 정조실록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成勝)이 도총관으로 추증되었는데 단종 복위 모의 당시 도진무(都鎭撫)가 있었다. 동지중추원사 유응부를 부총관으로 날조하면서 지중추원사 성승을 도총관으로 도진무 김문기를 이조 판서,3중신으로 3중신(三重臣)으로서 대군(大君), 군(君)인 왕자(王子)가 아닌 이양을 5종영(五宗英)에 추가하여 6종영으로 날조하였으나 이양은 종영(宗英)이 될 수 없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단종(端宗) 복위(復位) 모의 거사를 선동한 다른 난신(亂臣)들과 함께 죽었는데, 영조조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하였다. 정단(正壇)에 배식한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이어(李어), 영풍군(永豊君) 정렬공(貞烈公) 이전(李瑔) 이상이 5종영, 여양부원군(礪良府院君) 충민공(忠愍公) 송현수(宋玹壽),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돈녕부 판관 권완(權完) 이상이 4의척,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 인(皇甫 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상이 3상신,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판중추원사 이양(李穰) 이상이 3중신, (증(贈) 도총부 도총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별운검(別雲劒)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 병조 판서 첨지중추원사 별운검(別雲劒) 충강공(忠强公) 박쟁(朴崝) 이상이 양 운검,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 도진무(都鎭撫)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이상이 사6신, 증(贈) 형조 판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증(贈) 도총부 부총관) 동지중추원사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백(河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집현전 수찬 허조(許慥),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순흥부사(順興府使)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도진무 정효전(鄭孝全), 증 공조 참판 영월부 호장 엄흥도(嚴興道)의 32인이다. (헌납 유악주(兪岳柱), 좌의정(左議政) 유언호(兪彦鎬), 원임 직각 남공철(南公轍), 승지 유한녕(兪漢寧), 대사간 유한모(兪漢謨), 장령 남혜관(南惠寬)이 의논하여 정조에게 아뢴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배식 충신은 세조실록의 현대의 대법원 판결문과 같은 세조의 교서(敎書) 내용과 전혀 다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승을 도총관으로 동지중추원사 유응부를 부총관으로 추증(追贈) 후 배식(配食)하였으나 1456년 6월 도진무(都鎭撫)는 있었으나 도총부도 도총관도 부총관도 없었다. 1466년(세조 12) 도진무(都鎭撫)를 도총관(都摠管)으로 개칭하였다. 동지중추원사 유응부를 부총관으로 날조하면서 지중추원사 성승을 도총관으로 도진무 김문기를 이조 판서로 3중신이며 대군(大君), 군(君)인 왕자(王子)가 아닌 판중추원사 이양(李穰)을 6종영으로 날조하였다.)







1800년 4월 12일 한성과 외방의 유생 김종진(金鍾眞) 등이 정조에게 상소하기를 “지난 단묘조(端廟朝) 때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 등은 세상에서 말하는 6신(六臣)입니다.”하였다. 1811년 4월 22일 경기 유생 이유제(李維濟)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단종조(端宗朝)의 6신(六臣)인 고(故)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우뚝한 충성과 높은 절개는 국사(國史)인 국승(國乘)에 소상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저 이개·류성원·김문기 세 사람만은 유독 뒤를 이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으니, 하 충렬공(河 忠烈公)·성 문충공(成 文忠公) 두 신하에게 입후(立後)하게 한 사례에 의거하여, 그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하니 순조가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훌륭하다. 세 충신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표시하는 마음에서이니 예조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하였다. 1876년 12월 13일 사성(司成) 조성학(趙性鶴)이 고조에게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는 바로 단종(端宗) 때의 사육신(死六臣)을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봉행하는 타령(妥靈)하는 곳입니다. 신의 조상인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와 이맹전(李孟專)·조원호(趙元昊)·김시습(金時習)·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도 역시 그 때 숨어 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조용히 지조를 지켰기 때문에 후손들이 일컫는 세소칭(世所稱)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불렀으며,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과 그 절개와 의리는 같습니다. 정묘(正廟) 때에 세소칭(世所稱) 생육신(生六臣)을 추향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미처 그럴 만한 겨를이 없어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특별히 시행을 허락하여 모두 한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하였다.1884년 1월 24일 강원도(江原道) 유생 남계근(南啓近) 등이 상소하여 단묘(端廟)조의 후손들이 일컫는 세소칭(世所稱) 생육신(生六臣) 중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 정숙공(貞肅公) 성담수(成聃壽)를 모두 창절사(彰節祀)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였다.







1902년 2월 4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Gojo Gwangmooje:1897-1919)에게 의정부 찬정(議政府 贊政) 이용직(李容稙)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방계 친족인 증 이조 판서(吏曹 判書)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는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6신(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그 높은 충성과 큰 충절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으니 신이 다시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제 마음에 오래도록 한스러웠습니다. 옛 날 우리 역대 임금들 때에는 충성과 절개를 장려하고 고무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6신에게 이미 관직을 회복시키고 작호(爵號)와 시호를 추증하며 치제(致祭)하고 또 그들을 모신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해 주었고 백대토록 제사를 옮기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오랫동안 제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것은 저 세상에서 억울해 하는 분의 공을 드러내고 위로해 주는 정사일 뿐만 아니라 강상(綱常)을 추켜세우고 명절(名節)을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참으로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옛 날 선조 대왕(宣祖大王)은 6신의 후손들을 거두어 등용하라는 전교를 내렸고 숙종(肅宗) 때에는 선조(宣祖)의 이 전교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고 여겨서 즉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손을 수소문하여 급히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6신 중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에게만 후손이 있고 그 밖의 다섯 신하에게는 모두 후손이 없어서 외가의 후손으로 제사를 받드는 사람도 등용되는 은택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방계 친족인 충간공 이개의 경우에는 제사를 주관할 친손과 외손들이 모두 없어서 노량진 강가에 있는 무덤이 길손들만 구슬프게 만들었으니 떠도는 넋이 어찌 굶주리지 않겠습니까? 이 다섯 신하의 열렬하고 뛰어난 기개와 절조는 천지를 울리고 해와 달을 꿰뚫을 만한데도 의지할 데 없이 방황하니 어찌 끊어진 것을 잇고 망하는 것을 보존하는 의리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옛 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에서 절개를 지켜 죽은 박지(朴篪)는 바로 세 종사관(從事官)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역시 대를 이을 후손이 없기 때문에 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는 특별 명령으로 후사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비록 대가 바뀌면 소목(昭穆) 차례를 계속 그대로 두기는 어렵지만 예법에는 의리를 거론하는 것이 있고 일에서는 권도(權道)도 중요하여 귀신의 이치와 인정(人情)에 부합되게 함으로써 한 시대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로 하여금 유감이 없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큰 성인의 조처가 모든 제왕들보다 뛰어나 능히 한 시대의 전례(典禮)와 천고의 표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후손이 없는 다섯 신하들에 대하여 정조(正祖) 때 행했던 박지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역시 모두 사손(祀孫)을 세우도록 명령함으로써 끊어진 대를 이어 오랫동안 지내지 못한 제사를 지내게 하고 폐하의 깊고 큰 사랑과 혜택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사람들에게도 미치게 한다면 이야말로 훌륭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되리라고 봅니다. 이에 신은 외람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않고 종중(宗中)에 알린 다음 1가(一家) 사람인 이두복(李斗馥)의 둘째 아들 이중원(李重遠)을 충간공 이개의 사손으로 세우려고 합니다마는 신중한 문제이므로 신의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라고 해서 제 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특별히 윤허하여 빨리 장례원(掌禮院)에서 품처(稟處)하게 함으로써 대를 이을 사람을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는 동시에 또 정려문을 세우도록 명함으로써 풍속과 교화를 바로 세우소서. 이 밖의 네 신하인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에 대해서도 각기 그들의 집안에서 사손(嗣孫)을 세우게 하며 모두 정려문을 세워주는 은전을 베풀어 주소서.”하니,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Gojo Gwangmooje:1897-1919)가 비답하기를 “나라에서 충성과 절개를 장려하는 뜻에 부합되는 것이니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모두 상소의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하였다.1909년 1월 7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Gojo Gwangmooje:1897-1919)가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6신(六臣)의 뛰어난 충성과 절개는 위아래로 천년 동안 대비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 행차가 그들의 무덤을 지나게 되니 더욱 감회가 크다. 고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무덤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하였다.







단종조에 극변(極邊)에 좌천되었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마자 영전한 친세조파이며 아들이 연좌되지 않은 단종 복위 모의 연루 누명을 쓴 3급 난신인 유응부(兪應孚)의 후손들은 세조조부터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까지 고관 벼슬을 지냈다. 연종(연산군 묘호 추상)조에 유여림(兪汝霖)은 예조 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유기창(兪起昌)은 만포 첨절제사(滿浦 僉節制使)를 지냈다.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학자이며 명필이었다. 유여림의 아들 유강(兪絳)은 명종·선조조의 문신으로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유여림의 손자 유홍(兪泓)은 선조조에 좌의정을 지냈으며 망서 육신전의 분서를 막았다. 그의 아들 유대수(兪大脩)·유대진(兪大進)·유대일(兪大逸)·유대정(兪大禎)·유대경(兪大儆)·유대건(兪大建) 등이 모두 선조와 광종(광해군 묘호 추상)조에 벼슬을 하였다. 유대일의 아들 유백증(兪伯曾)은 이조 참판·대사간을 지냈다. 유철(兪櫛)은 경기도 관찰사·대사간을 거쳐 현종조에 대사헌에 이르렀다. 유계(兪棨)는 현종조에 예문관 제학을 거쳐 대사헌·이조 참판을 지냈다. 유철의 손자 유척기(兪拓基)는 영조조에 노론(老論)의 원로로 영의정을 지냈다. 그의 사촌형 유최기(兪最基)도 대사성·대사헌·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영의정 유척기의 조카이며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 유직기(兪直基)의 아들인 경연관(經筵官), 돈령부 도정(都正) 유언집(兪彦鏶)과 이조 참판 우의정,좌의정 유언호(兪彦鎬) 형제도 영조조·정조조에 천권(擅權)하였다.1791년 2월 21일 정조가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는데 헌납 유악주(兪岳柱), 좌의정(左議政) 유언호(兪彦鎬), 원임 직각 남공철(南公轍), 승지 유한녕(兪漢寧), 대사간 유한모(兪漢謨), 장령 남혜관(南惠寬)이 정단(正壇),별단(別壇)에 배식(配食)할 충신을 의논하여 정조에게 아뢰었다. 정단(正壇)에 배식(配食)한 32인 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도진무(都鎭撫)이며 양 운검(兩 雲劒)은 성승(成勝)·박쟁(朴崝)이다. 유사수(兪思守)가 연좌되어 죽었다는 실록 기사가 없으므로 정조조 별단(別壇)에 연좌되어 죽은 유사수(兪思守)를 배식(配食)하였다는 정조실록 기사는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다.







1791년 2월 21일 정조가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는데 헌납 유악주(兪岳柱), 좌의정(左議政) 유언호(兪彦鎬), 원임 직각 남공철(南公轍), 승지 유한녕(兪漢寧), 대사간 유한모(兪漢謨), 장령 남혜관(南惠寬)이 세조실록을 상고(詳考)하지 않고 소설 육신전(六臣傳)에 근거하여 정단(正壇),별단(別壇)에 배식(配食)할 충신을 의논하여 정조에게 멋대로 아뢰었다. 정단(正壇)에 배식(配食)한 32인 중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이조 판서도 도총관도 아닌 도진무(都鎭撫:1466년 세조가 도총관으로 개칭)이며 양 운검(兩 雲劒)은 성승(成勝)·박쟁(朴崝)이다. 1466년(세조 12) 도진무(都鎭撫)를 도총관(都摠管)으로 개칭하였다. (동지중추원사 유응부를 부총관으로 날조하면서 지중추원사 성승을 도총관으로 도진무 김문기를 이조 판서로 3중신 이양을 6종영으로 날조하였다.)세조실록에 아우 유응신(兪應信)과 유사수(兪思守)가 연좌되어 죽었다는 실록 기사가 없으며 정조조에 연좌되어 죽은 유사수(兪思守)를 별단(別壇)에 배식(配食)하였다는 기사는 날조(捏造)된 역사 왜곡이다. 6신을 왜곡한 남효온(南孝溫)은 1513년(중종 8) 좌승지에 추증되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남효온(南孝溫)이 만년에 저술한 망서(妄書) 육신전(六臣傳)은 남공철(南公轍)의 고조할아버지 남용익(南龍翼:1628-1692)이 예문관 제학인 숙종조에 간행되었다. 남공철(南公轍:1760(영조 36)∼1840(헌종 6))이 순조조에 남효온이 왜곡한 6신 기사가 있는 정조실록을 편찬하였다. 영조,정조,순조,헌종조 남공철(南公轍)의 고조할아버지는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정중(南正重), 할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 아버지는 정조의 스승 대제학인 남유용(南有容:1698-1773)이다. 남홍중(南弘重:1754- )의 아들인 남정철(南廷哲:1840(헌종 6)∼1916)은 1897년 6월 사례국(史禮局) 위원이 되었다. 남정철의 스승인 유신환(兪莘煥)의 아버지는 현감 유성주(兪星柱)이며, 증조부는 대사헌을 지낸 유언술(兪彦述)이고,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한순(兪漢純)이다. 시종원 경(侍從院 卿) 윤덕영(尹德榮)의 동생인 윤택영의 인사 청탁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1907년 임명한 황태자 이척의 부인 윤씨의 아버지인 매국 기여로 국고금(국유재산) 101억원을 챙긴 윤택영(尹澤榮)의 부인이 유씨(兪氏)이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日本軍國主義 總督府:1910-1945)가 1930-5년 사관(史官)이 매일 기록한 사초(史草) 등 사료(史料)의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 편수(編修), 수정, 첨삭하는 감수(監修)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1906-1910), 총독부(1910-1945) 일지(日誌) 성격의 6신을 왜곡한 이왕가고종실록 편찬위원(編纂委員)은 위원장은 시노다 지사쿠이며 감수위원(監修委員)은 경
2014-05-06 22: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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