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에 의해 촉발된 2·8 대한광복선언 3·1 대한광복운동
 김민수
 2015-02-07 08:56:57  |   조회: 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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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에 의해 촉발된 2·8 대한광복선언 3·1 대한광복운동


일본은 대한국(大韓國) 불법(不法) 병탄(倂呑)과 광복운동(光復運動) 탄압을 사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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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군사전략상 기지로 사용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불법(不法) 늑결(勒結)하여 1900년 10월 25일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국령 독도를 1905년 1월 불법(不法) 강점(强占)한 일본군국주의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영국과 영일동맹,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대한국 독점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不法) 늑결하였으며 일본군국주의 통감부는 1909년 대륙 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늑약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고 북해(北海:백두산 - 무산(茂山) - 회령(會寧) - 온성(穩城) - 녹둔도로 흐르는 바다)를 토문강,도문강의 한국 이름인 두만강으로 둔갑시켜 대한국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국령 간도를 청나라에 불법(不法) 양도하였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19년 1월 21일 아침 조직화,체계화되어가는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국주의 총독부의 독살에 의해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崩御)하였는데 2·8 대한광복선언,경운궁 대안문·고조 광무제 어극40년칭경기념비전·보신루·원각사 터 앞 3·1 대한광복운동의 배경이 되었다.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에 의해 황태자 이척의 대리청정을 명한 고조 광무제는 정미대한독립운동,대한인국민회,대한독립의군부,대한광복군정부 등 대한광복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었으며 대동단,신한혁명단이 고조 광무제를 망명시켜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을 활성화하려 하였고 고조 광무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적극 지원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의 전초가 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는 음력 1918년 11월(양력 1919년 2월 1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1919년 2월 간도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 운동가들 39명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때가 음력으로 무오년인 1918년 11월(양력 1919년 2월 1일)이었기에 무오대한독립선언으로 불린다. 간도 길림에서의 무오대한독립선언 직후 일본 도쿄에서는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었고 곧이어 전국적인 3·1 운동이 일어났다. 조소앙이 기초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에는 사기과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 적자(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한 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4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는 지봉(祇奉)하여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1919년 1월 18일부터 열리는 파리 강화회의에 재미 한국인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贊鎬)·정한경(鄭翰景)이 미국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1918년 12월 한국대표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이 영국인이 고베에서 경영하는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의 보도를 통해 일본 유학생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보도를 접한 재일유학생들 가운데에는 일본군국주의 불법 통치를 반대하고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의사를 파리 강화회의에 반영시키기 위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최팔용(崔八鏞)이 청년독립단 발족을 기독교청년회관의 재일 대한국 유학생 600여 명 앞에서 선언하고 이광수(李光洙)가 2·8대한광복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백관수(白寬洙)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金奎植)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趙素昻)이 동경에 파견되어 재일 대한국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일본군국주의의 대한(大韓) 병탄(倂呑)이 대한국인의 의사와 반하는 것이므로 대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대한국인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며 대한국인의 대한광복운동을 촉구하였다. 1919년 1월 일본군국주의 총독부에 의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에 의해 촉발된 2·8 대한광복선언은 3·1 대한광복운동,6·10 대한광복운동,11·3 대한광복운동,한성정부,대한국민의회,상해정부,대한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의 기폭제가 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본군국주의로부터 대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아 1910년 8월 29일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불법(不法) 병탄(倂呑)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大韓) 광복(光復)을 하였으며 1948년 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2·8대한광복선언서는 한국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이민족(異民族)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바가 없는 민족이라고 과시하고 있다. 일본군국주의의 국권강탈과 침략정책을 고발하고 있다. 청일전쟁까지는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온 일본이 러일전쟁 후에는 폭력의 방법으로 한국을 불법 병합했으며 경술늑약 늑결 후 한국민족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한민족이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불법 통치를 계속한다면 한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경술늑약의 폐기와 대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이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고 있다.

















3·1 대한광복운동은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기초하였으며 최남선의 초안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대한국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의친왕부인 사동궁 남쪽 태화관(泰和館)에서 대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원각사 터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 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한성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보신루를 지나 숭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안문을 향하였다. 대안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경운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한성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대한 독립 만세(大韓 獨立 萬歲)", "대한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돈의문을 돌아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 때에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 독립(大韓 獨立)'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 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운종가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 해산하였다. 다음 날 일본군국주의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1919년 3월 1일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의 문인 윤충하(尹忠夏)는 한성의 대한광복운동 상황과 파리강화회의 등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大韓國)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작성하여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곽종석은 김창숙(金昌淑)과 상의하였는데, 김창숙은 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 유교 대표가 빠졌으므로 국제 활동의 사명은 유림(儒林)에서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활동에 착수하였다.김창숙은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국제 여론을 조성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유림대한국독립청원파리장서운동(儒林大韓國獨立請願巴里長書運動)이 실패하더라도 한민족의 대한 광복에 대한 염원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창숙(金昌淑)은 김정호(金丁鎬)와 추진 방안을 논의하고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儒林)을 대상으로 서명 작업을 전개하는 동시에 운동자금의 준비에 착수하는 한편 파리장서(巴里長書)의 문안 작성을 장석영(張錫英)에게 맡겼다. 곽종석을 중심으로 서명 작업과 자금 모금을 하여 상경한 김창숙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충청도 유림도 같은 취지에서 문안을 만들어 임경호(林敬鎬)를 파리로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게된 김창숙은 임경호와 논의하여 서명자로 김복한 등을 추가하고 자신이 대표로 파리로 가게 되었다.유림대한국독립청원파리장서운동(儒林大韓國獨立請願巴里長書運動)은 1919년 4월 12일 성주(星州) 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던 송회근(宋晦根)이 체포되면서 전모가 드러났으며 일본군국주의는 곽종석(郭鍾錫), 장석영(張錫英), 송준필(宋浚弼) 등이 체포, 투옥되면서 서명자를 탄압하였다.











황태자 이척(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1919년 2대 황제 등극))은 1874년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와 명성황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1875년 조선국 왕세자로 책봉됐으며 1897년 대한국이 건국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됐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본군국주의 통감부의 강박으로 고조 광무제가 강제로 황태자의 대리청정을 명하고 황제위에서 물러나자 황태자로서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일본군국주의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한반도에서 다른 제국주의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국의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1909년 9월 4일 간도의 이권을 위해 북해(北海:백두산에서 녹둔도로 흐르는 바다)를 북간도로 흐르는 토문강,도문강의 한국 이름인 두만강으로 둔갑시켜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국령 간도를 청국에 불법 양도했다. 대한국 불법 병탄의 발판을 공고히 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저격당했다. 1910년 일본군국주의는 황태자 이척(순종 융희제)에게 대한국을 불법 병탄하는 경술늑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했으나 황태자 순종 융희제는 경술늑약 늑결에 비준 동의하지 않았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했고 대한국은 일본군국주의에 불법 병탄됐으며 순종 융희제는 1926년 붕어(崩御)했다. 6ㆍ10 대한광복운동은 1926년 6월 10일 대한국의 2대 황제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의 인산(因山)일을 기해 일어난 3ㆍ1 대한광복운동을 잇는 거국적ㆍ범민족적인 대한국(大韓國) 광복운동(光復運動)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됐다. 그러나 일본군국주의 총독부는 3·1 대한광복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인쇄 직공 민창식, 이용재는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해 순종 융희제의 대여(大輿)가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檄文)을 살포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檄文)의 내용은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타도(打倒)', ‘토지는 대한국 농민에게’, ‘1일 8시간 노동’, ‘우리의 교육은 우리 손에’ 등이었다. 6월 10일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의 인산(因山)에 참가한 학생은 2만4000여 명이었다. 군중의 호응으로 대한국(大韓國1897- ) 광복운동(光復運動)이 확대됐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 민족진영의 조직 약화로 6ㆍ10 대한광복운동은 일제에 저지당했다. 6ㆍ10 대한광복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고창, 원산, 개성, 홍성, 평양, 강경, 대구, 공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다.6ㆍ10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한 대한국인 천여 명이 체포(逮捕), 투옥(投獄)됐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와 근우회(槿友會)의 조직과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국주의로부터 대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大韓) 광복(光復)을 했으며 1948년 서울에 민주공화제의 자주독립적인 대한국 정부가 수립됐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투극이 벌어졌다.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 항의하였다. 독서회(讀書會) 중앙부의 책임비서 장재성(張載性)의 주도로 학생들은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히 일본군국주의를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항일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대한국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탄압을 하였고 심지어는 개인의원인 태양의원에서 치료받던 학생들을 도립병원장이 치료할 가치도 없다면서 비하하는 망언을 하여 공분을 샀다. 장재성은 광주학생들을 설득하는 유인물을 작성했으며 인쇄를 맡은 오쾌일에 의해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박기석의 집에서 약 1,000장을 인쇄하였다. 그리고 1929년 11월 12일 오전 8시 경 오쾌일은 광주고보와 광주농고의 학생들을 통해서 유인물을 배포한다. 당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同盟休學)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일본군국주의는 25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검거했으며 사회운동단체 간부들도 검거당했다. 일단 경찰에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교당국의 가혹한 처벌이 잇따랐고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기정학, 퇴학으로 광주학생운동 가담자들을 탄압하였다. 일본군국주의는 12월 28일까지 언론 통제를 단행하여 11·3 대한광복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고 전국적 11·3 대한광복운동으로 확대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각종 탄압에 대한 소문과 풍문이 더욱 커지면서 그동안 웅축되었던 항일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당시 11·3 대한광복운동의 전개과정은 "약소 민족 해방 만세!,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타도(打倒) 만세!,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라는 구호를 사용하였다. 학생운동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맞서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분노와 우리 민족의 독립적 삶을 되돌려야 한다는 의기에 바탕을 둔 건강한 청년정신으로부터 발로했다.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 총무간사였던 장석천(張錫天)은 11월 16일 한성으로 올라와 조병옥, 김병로 등 신간회 중앙 간부들에게 2차 시위의 전말을 보고하고 이어 청년동맹 중앙 간부 곽양훈, 차재정 등에게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를 전국 11·3 대한광복운동으로 확산할 것을 역설했다. 이 두 모임에서 한성 각 학교에 이미 조직되어 있는 비밀 독서회 조직을 통해 11·3 대한광복운동을 한성으로 확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장석천은 특별히 휘문고보 5년생이었던 후배 장홍염을 설득하여 장홍염(張洪琰)이 한성의 주요 한국인학교들의 학생운동가들을 접촉하였다. 장홍염 자신이 1년 전에 'ㄱ당 사건 관련되어 수개월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석방된 처지였다. 11월 20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준비기간을 거쳐 1929년 12월 3일 한성의 각 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에게는 광주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한 전말과 11·3 대한광복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이 모두 뿌려졌다.일본 경찰의 재판 전에 피고인을 구금하는 예비검속(豫備檢束)으로 한성 지역의 조직 주동자들이 잡혀 갔지만 드디어 12월 9일부터 한성지역 학교들의 11·3 대한광복운동이 시작되었다. 12월 9일에는 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 보성고보 학생 400여 명, 중앙고등보통학교 700여 명,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12월 9일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2월 13일까지 한성지역에서만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동맹휴학(同盟休學)에 참여하였고 그 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한성 지역에서만 45명이 구속되고 이 가운데 35명이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당시 신간회(新幹會)는 이 광주학생 시위운동을 전국적 11·3 대한광복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0일 권동진(權東鎭), 허헌(許憲),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安在鴻), 조병옥(趙炳玉), 홍명희(洪命熹),한용운(韓龍雲),주요한(朱耀翰) 등이 대책회의를 갖고 12월 13일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를 갖고 곧바로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 운동을 갖고 지방지회에도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일본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12월 13일 아침 6시 신간회(新幹會) 주요 간부 30여 명을 예비 검속(豫備 檢束)하여 한성의 진상발표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지방지회에 보내는 지시문은 이미 전달되어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1930년 3월 초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11·3 대한광복운동이 계속되었다.
2015-02-07 08: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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