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돈과 배경 없는 이웃을 위해 의대, 법대를 가는가?
아직도 돈과 배경 없는 이웃을 위해 의대, 법대를 가는가?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4.14 00:00
  • 호수 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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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육 정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④

   

권기복
칼럼위원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수학이 딸린다며 과외지도를 부탁했다. 아내는 마땅한 과외교사를 수소문하여 지난달부터 과외수업을 받게 하고 있다. 그 과외 교사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대전 한의대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실력을 인정받는 만큼 주말 및 방학 중 과외지도로 수업료 및 생활비는 족히 버는 모양이었다. 필자가 근무하기 이전에 본교를 졸업한 학생인지라 서먹서먹한 가운데 몇 마디의 말을 나누기도 하였다.

“서울대학을 졸업해도 고작 회사원 밖에 더 할 것이 있나요. 그것도 사오정으로 불릴 만큼 신분 보장이 제대로 되지 않고……. 한의대를 나오면 돈    도 더 벌 수 있고, 평생 보장이 되잖아요.”

지금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다니고 있어도 자신에 대하여 당당함이 풍겨졌다. 필자의 제자 한 명은 중학교 과학 교사가 꿈이었다. 지방대학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자신이 있었던지 학업에 전념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기술이나 교사의 품성이 같다고 치면, 좀 더 실력 있는 교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라는 말과 함께 상담을 하였다. 그는 3학년 2학기부터 학업에 전념하였다. 지금은 원광대학교 한의대를 다니고 있다.

이외에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다니는 제자는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의대와 법대로 지나치게 쏠리고 있다. 의대와 법대에 인재가 필요 없지는 않지만, 모든 인재가 쏠려야 할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제 각각의 학문 분야에 인재가 골고루 분포되어야 모든 산업과 사회, 문화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 권력의 억압과 가난에 찌들어 있었던 시기에 법관이나 의사는 정의의 대상이었다. 권력의 남용에 대항할 힘이 없는 서민을 위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는 논리는 상당히 감동을 주었다. 돈이 없어서 때로는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가난한 서민을 위해 의사가 된다는 논리도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위와 같은 내용의 신파극이 유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힘이 없고 돈이 없는 서민들을 위한다는 법관과 의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는 법조계와 의료계가 가장 권위적이고, 비개방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기본권 침해를 받은 경우에 변호사를 쓴다는 것은 가정 파탄으로 이어진다고 여기고 있다. 검사는 너무나 무서운 존재다. 그들은 서민 가까이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상류층 곁에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병원에 가 본 사람은 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필자는 이 세상의 서러움 중에 돈이 없는 환자의 서러움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신파극의 <검사와 여교사>는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데, 오늘날의 <검사와 여교사> 사건은 쓴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이웃을 위해 의대나 법대를 간다는 것은 거의 다 구실에 불과하였다. 돈과 배경을 손에 쥐기 위해 인재들이 의대와 법대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소수겠지만, 소명의식을 가지고 진실되게 의사와 법관으로 최선을 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인구 15,000명이 채 안 되는 모 읍내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의사의 월 소득이 5,000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 의사가 그 위치에 서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경비가 들어갔겠지만, 월 소득이 2~3백만 원에 불과한 일반 직장인들이나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소득으로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지나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생산단가보다 2~10배 비싼 물품은 아마 의약품 외에 또 있을까 싶다.

한국의 젊은 인재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지나치게 현실위주로 몰리지 말고, 각 분야에서 한국의 미래를 불 밝히는 횃불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교육의 주된 기능은 선조들이 쌓아놓은 학습과정의 교양 분야와 한두 가지 전문분야를 이수하고, 이를 한 단계 도약하도록 노력하는데 있다. 교육이 권력과 돈을 손아귀에 쥐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장 천박한 짓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각국의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천거를 부탁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200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공자의 의무였다. 한 제후가 “그대는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하자, 공자는 “인(仁)의 정치를 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제후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어찌 인의 정치가 필요하겠는가?” 하고 공자를 내쳤다.

10여 년간 번번이 내침을 당하면서도 공자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공자는 금권과 권력이 최고라는 현 상태를 용납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시대라 하여도 현실위주의 술수보다는 인을 바탕으로 한 도덕정치가 정치의 근본임을 주장하였다. 비록 당대에 공자의 유가(儒家)사상이 먹혀들지 않았지만, 한(漢)나라 때부터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의 현실적 이익을 좇기보다는 보다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해법을 찾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돈 없고 배경 없는 이웃을 위해 의대나 법대에 가겠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한 시대에 돈이나 권력을 쥐고 살아보겠다는 소인배 의식을 버리고, 자기의 삶과 사회 발전을 위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를 개척하는 개척자 정신이 절실한 때가 아닐까 싶다. 미래는 미리미리 준비한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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