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수 선생 생가 활용을 환영한다
박경수 선생 생가 활용을 환영한다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9.03.28 13:33
  • 호수 46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산면 죽촌리에 있는 박경수 선생의 생가에 가보면 그가 작품활동을 하던 때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가 늘 들춰보던 서가의 수많은 책들이며 책상 위의 재떨이까지 그대로이다.

이곳을 군이 매입하여 문화·예술인의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 한다. 군의회에서도 이를 승인하여 주차장 등 주변을 새단장하는 일만 남았다. 총사업비 3억8천만원 가운데 2억원은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시행하는 생활문화 공동체만들기 사업에 공모하여 확보할 방침이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결정을 환영한다.

박경수 선생은 1930년 이 집 뒤편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집안이어서 남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학교를 다닐 때 그는 집안 농사일을 거들었고 밤에는 강의록을 읽었다. 해방되던 해 16세의 소년 박경수 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운전 기사의 기술까지 습득하였다 한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책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20세에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따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4년 뒤에 중학교 교사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대학 졸업자와 다름없이 중등학교의 교단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육자로보다는 문학수업에 몰두하여 1955년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에 단편소설 <그들이>가 입선되며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에 이르렀다. 기자로 입사하여 장준하 선생과 함께 <사상계>를 펴내면서도 그는 단편을 계속 발표하여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그는 어떤 공백이나 휴식없이 꾸준히 소설을 써왔고, 다른 작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고르지 못하고 태작을 내놓기도 하는 일 없이 알찬 작품만을 발표해오고 있다.”는 것이 당시 박경수에 대한 당시 문단의 평이다.

1969년 1년간 <신동아>에 <동토>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71년 이 작품으로 제8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열었으며 작가로서 위치도 확고해졌다.

1988년에 고향 한산으로 낙향한 그는 <사상계>에서 일할 때 모셨던 장준하 선생의 평전 집필에 매달렸다. 1995년 <재야의 빛 장준하>(해돋이)로 결실이 맺어졌다. 2003년에는 이를 증량 보완한 <장준하>가 ‘돌베개사’에서 나와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

이러한 그는 현재 부인과 함께 서울 북아현동의 어느 요양병원에서 쓸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부인도 간병인의 보호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모든 세상일이 경제논리로 위주로 흘러가는 요즈음 군의 이러한 결정은 팍팍한 먼지길을 적시는 한줄기 단비처럼 다가온다. 서천에 와서 박경수 선생의 사상과 문학혼을 느끼고 이들이 받은 감화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