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암리의 역사를 복원하자
장암리의 역사를 복원하자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9.04.06 11:39
  • 호수 46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강하구에서는 서천군의 군조인 검은머리물떼새를 비롯하여 천연기념물인 개리, 노랑부리저어새와 온갖 도요물떼새들, 오리 등의 철새들이 찾아온다. 이처럼 많은 철새들이 금강하구를 찾는 이유는 먹잇감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도 마찬가지였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한 곳은 강하구나 바닷가였다. 서천에서 인류가 가장 먼저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던 곳이 오늘의 장항읍 장암리였다.

선사유적지가 발굴된 곳은 장암리 산 9번지 일원 당크메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전망산에서 흘러내려온 산줄기가 끝나며 모래사장이 시작되는 곳을 모래터라 불렀다.

‘장암’이라는 지명은 13세기 고려 충렬왕 때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온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의 태종 춘추공조에서는 기벌포를 ‘장암 또는 손량, 다른 한편으로는 지화포 또는 백강(卽長巖,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이라고 하였으며, 백강을 기벌포(白江 卽伎伐浦)라고 하였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관문이었던 곳이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무참히 짓밟으며 일제는 비철금속 제련소를 지었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제련소는 가동되며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일정부분 역할을 하였지만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모를 병으로 죽어갔다.

‘제련소 끼고사는 장암리 주민들 집단 암발병’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5월 본지에 의해 이 사실이 알려지며 장암리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작년 7월에는 환경부에서 제련소가 주민 건강에 미친 영향을 조사했다. 최근 그 중간결과가 나왔다. 상당수가 체내 카드뮴 잔류량이 기준치를 넘었다. 특히 제련소에서 가까울수록 더 높았다.

건강 영향조사를 받고 난 이후에도 장암리에서는 여러 사람이 암으로 죽어갔으며 주민들은 오염된 땅에서 농사도 짓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 뿐만이 아니다. 이곳 모래터 뒷산은 서쪽으로 바다와 닿아 있어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에 깎여나간 해식 해안이 절경을 이루었던 곳이다. 그러나 군산외항을 축조하면서 살점이 험하게 뜯겨나갔다. 해발 30여미터나 될까한 나지막한 야산의 동쪽사면은 장항의 한 공장을 지을 때 또한 살점을 내주었다.

최근 모래터 뒷산에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됐다. 자살한 장소가 민가와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여태 방치되어 유골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짐승들이 그 사체를 먹잇감으로 삼았을 것을 생각하면 오싹한 느낌이 든다. 자살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죽는 이유를 유서로 남기거나 쉽게 발견될 수 있도록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려 한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은 민가에서 가까운 그 장소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백골만 남도록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찬란했던 역사의 현장이 죽음의 땅이 돼버린 탓일까. 그러나 금강은 천리 물길을 흘러 오늘도 이곳 장암리 어귀를 더듬고 있다.

서천의 정신은 무엇인가. 강 하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인문지리적 고찰을 해야 정답이 나온다. 강 하구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했을 때 가장 서천다운 특성을 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장암리에 스며있는 옛 역사와 문화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