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락눈
싸락눈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01.04 11:31
  • 호수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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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웅 순 칼럼위원

▲ 신웅순 칼럼위원
세월은 수십년 동안 내게 연민의 정을 가르쳐 주었다. 봄비는 내 영혼에게 촉촉한 손길을 내밀었고 소나기는 내 육신에게 준엄한 회초리를 들었다. 가을비는 내 그리움에 서늘한 주렴을 드리웠다. 이 겨울 쏟아지는 싸락눈은 무슨 심술이 있어 모질게도 나를 채찍질하는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쇠죽 여물에도 싸락눈은 내렸고, 외양간 소잔등에도, 찌그러진 강아지 양철 그릇에도 싸락눈은 내렸다. 키 낮은 탱자울에도, 흙담 용고새 위에도, 돼지울 검불에도 싸락눈은 내렸다. 댓돌의 고무신짝, 닭장 횟대, 흙벽 시래기 위에도 싸락눈은 내렸다.

새벽 바람과 함께 사립문을 열고 마당 귀퉁이로, 부엌문으로 우우우 몰려왔던 싸락눈. 때론 툇마루까지 올라와 ‘투두투둑’ 문살을 피맺히게 때렸던 싸락눈. 그것은 차가운 산촌의 싸락눈도, 짜디짠 어촌의 싸락눈도 아니었다. 포근한 산과 고즈넉한 들이 있는, 매운 내 고향 농촌의 싸락눈이었다.

떨판 같은 이빨을 앙다물고 툇마루, 토방을 거쳐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새벽 측간 가는 길. 미처 싸락눈을 털지 못하고 맨발로 고무신을 끌고 갈 땐 힘줄이 끊어질 것만 같았고 팬티와 런닝구 바람일 땐 심장이 얼어 터질 것만 같았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그 무서운 새벽 칼바람을 난 잊을 수 없다.

어린 시절은 그렇게 추운 겨울의 서문을 읽었다. 조금 커선 들 한 페이지, 강 한 페이지 줄 그어가며 산, 하늘가, 노을 한 페이지를 또박또박 읽었다. 겨울 바람, 뻐꾹새 울음, 바위 고개 그렇게 몇 페이지 줄을 긋다 나는 고향을 떠났다. 

나는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초등학교 5년 간의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서른에야 야간 대학에 편입했다. 억수 같이 소나기가 퍼붓던 날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다. 몇 달이 지나 간이역 근처 자취방에서 울었다. 혼자서 세상을 울었다. ‘타다타닥, 투두투둑’ 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머리맡 툇마루까지 와 문짝을 쌔리는 싸락눈. 새벽부터 그랬는지 툇마루에는 싸락눈이 지난 세월만큼 두툼하게 쌓여있었다.

배가 고팠다. 문을 열고 바라보는, 먼 싸락눈의 적막한 들녘은 뿌옇게 허기져 있었다. 그 허기진 적막을 찢으며 아침 완행 열차가 눈밭을 누벼가고 있었다.

싸락눈이 내리는 날이면 고향 생각이 났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먼 눈길을 요령 소리 남겨두고 떠난 어머니의 생각도 났다. 죽을 때까지 철들지 못할 것 같은 내게 애틋한 그리움을 주었으니 나는 철이나 들을 수 있을까.

밤새 들녘을 건너와 사립문 앞을 서성이다, 어떤 것은 툇마루로 쓸려가고 어떤 것은 댓돌이나 토방으로 몰려가던, 온 몸이 으깨질 것 같이 시리고 차가웠던 고향집 싸락눈. 이제 와 정겹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런가. 세월은 차가운 것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는가 보다.

세월은 내게 가르침을 준 인생의 경전이었다.

고향의 땅과 하늘에 싸늘한 시선만을 보내왔던 내게 싸락눈은 무슨 시비를 걸려고 오늘의 새벽잠을 일찍도 깨우는가.   

    * 시조시인  평론가  중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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