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탄신 160주년 기념 세미나 강연문<1>
■ 월남탄신 160주년 기념 세미나 강연문<1>
  • 민경배/백석대 석좌교수
  • 승인 2010.12.12 23:47
  • 호수 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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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선생과 한국현대사<1>

 

▲ 민경배/백석대 석좌교수
지난 1일 서울 YMCA 대강당에서는 ‘월남 선생 탄신 16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한마음 정신문화운동 전개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서울YMCA(회장 안창원)와 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대표회장 이윤구 전 적십자사 총재)가 함께 주최한 세미나에서는 민경배 박사(백석대 석좌교수)의 기념강연과 김명구 교수(서울장신대)의 주제발제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민경배 박사의 강연문 ‘이상재 선생과 한국현대사’를 3회에 나누어 싣습니다.

 

1. 한국정신 정통의 거대 인물

한국의 현대인물로는 이승만, 길선주, 안창호, 신채호, 이동휘, 김교신, 김인서, 백낙준과 같은 인물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월남 이상재는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가장 힘 있었던 민족의 스승, 겨레의 목자, 역사의 예언자로 추앙되기에 마땅한 어른이십니다.

이상재선생님의 출신과 그 성장 배경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그 분은 충남 출신입니다. 충청도는 그 양반의 점유율이 전국 15%에 이르는 상류층이 활거하던 고장입니다. 그때 기독교가 가장 치성하던 서북지방은 그 양반의 비율이 0.5%에 불과하였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분의 출신과 배경은 한국 근대사회의 상류 선비층이었습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6대손이었습니다. 한국 정신의 전통이 배어 있었던 가문출신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 분은 한국정신 정통의 거목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처음부터 부서층(婦庶層)대상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류층의 생리에 통하는 신앙형태가 굳어져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에른스트 튜럴취가 말했던 것처럼 위로와 감격, 보람과 환희 그런 종교적 감정으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강하게 밀고 나가는 전진적 지도적 추진적 동력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정숙(靜肅)보다는 행동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이상재선생님은 이런 형태의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류층에서보다는 상류 귀족 선비, 거기다 일본 미국을 처음 다녀온 개화파적인 지도급 인사들이 기독교 계층을 상징한 인물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류의 아픔 쓰다듬과 함께 상류의 지도적인 기능도 필요로 하는 데 그런 것을 수행한 것이 이상재였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상하의 폭이 클수록 동력이 커지고 사회적 영향력도 팽대(膨大)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 만나고 신앙 만나고

그런데 또 당시 한국정치계의 거물로 한 때 총리대신까지 지냈던 박정양(朴定陽)과의 오랜 인연은 그의 생애에서 아주 특별한 영향력을 미쳐서 그의 진로와 운명을 결정하는 묘한 영향을 남깁니다. 박정양의 집에서 13년간 개인 비서격으로 서생(書生)으로 오래 일하면서 성실하게 일한 그의 충실과 진실이 하나하나 커다란 이미지를 구성해 갔습니다. 양반집 출신으로 그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 성실하였고 거기서 그의 인품이 검증될 수 있었습니다. 작으나 크나 성실과 전력을 기울이는 태도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짓는 촉매작용을 한 것입니다. 박정양이 이끄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일찍이 다녀오는 행운이 그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한국이 처음 외국을 공식 방문하고 서양근대문명의 발전상을 시찰한 경우였습니다.
그의 나이 31세 때의 일입니다. 그러다가 37세 때에는 주미 전권대사로 임명된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가서 일등서기관으로 봉직한 일이 있습니다. 박정양은 이상재 선생님을 한국의 유용한 인물로 그 기초를 닦아준 은인이라 해서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드린 사건입니다. 50의 나이에 개혁당 사건으로 한성감옥에 유치되었을 때에 선교사들이 차입한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에 인도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성경 안에서 민족과 자신에 대한 사명을 확인하고 힘과 꿈을 불태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일생을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된 YMCA에, 58세의 나이에 교육부장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빛나는 생애가 테이프를 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나이에 그의 생애가 시작된 셈이었습니다. 거의 환갑에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교육부와 유도부 그리고 종교부를 관할하였습니다. 영(靈) 지(智) 체(體), 이런 YMCA의 삼각(三角) 그 지표가 그의 활동 지표와 상통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민족사의 사명을 차치하고라도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도성인신(道成人身)신앙 그 핵심을 체현하는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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