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탄신 160주년 기념 세미나 강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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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12.24 15:51
  • 호수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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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선생과 한국현대사<3>

▲ 민경배/백석대 석좌교수
6. 그의 장례식이 증언한 것
   (한국 전체를 아우른 엔진)

6. 그의 장례식이 증언한 것   (한국 전체를 아우른 엔진)

 

그분의 장례식은 1927년 4월 7일에 한국초유의 사회장으로 치루어졌습니다.
그의 서거는 한국사회 전체의 비통이었습니다. 그 사회장에는 246 단체가 참여하였고, 상여를 멘 단체수가 136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기독교 박멸을 외치고 그렇게 공격하던 과격 공산주의 단체인 한양청년동맹, 조선노동당 적성회(赤星會), 그리고 칼톱회와 같은 좌익 단체들도 여기 줄비하게 동참하여 그때만큼은 이심전심 한맘으로 조상(弔喪)하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한국사회 전 계층이 참여한 사실이 참 인상적입니다. 교회나 산업계 교육계는 두말할 곳 없고, 기생단, 전주예기권번(藝妓券番), 인력거(人力車)조합, 이발직친목회, 배달직공 친목회, 이렇게 상하(上下)층이 어울렸고, 홍명희(洪命熹)와 송진우(宋鎭禹)등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좌우가 소매를 같이하였습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이상재선생님의 일대 공적으로 우리 현대사에 대서특필될 사건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한번도 이런 감격과 화해를 경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 때 서울 사람들 20만이 이 장례에 나왔는데 당시 서울 인구는 50만이었습니다. 한산(韓山) 선영에 영구(靈柩)가 지날 때에는 경부선과 호남선 연로 일대가 겨레의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일심상조불언중(一心相照不言中)이라 하셨다는 말이 여기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형편에서 해석하면, 마음이 하나되면 서로 밝게 비쳐 말없이도 다함께 중심에 선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그 때는  다 하나였습니다. 그날이 그렇게 되돌아보아지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7. 말을 맺으면서

우리는 거대한 인물이 어느 시대나 있어야 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시대의 예언자가 있어야합니다.
존경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지도하는 지도자가 있고, 그렇게 따르는 국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상재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크고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현장 지침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이상재선생님은 58세 우리 나이로 59세, 환갑의 나이에 그의 필생의 사역인 YMCA 일을 고작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기독교가 중요하고 최고의 진리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만큼 그 기독교의 신앙대로 사는 것, 곧 기독교의 데스크로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상재선생님에게 그런 역할을 가능하도록 하였던 도체(導體)가 YMCA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YMCA와 이상재선생님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위의 실체인 것이 들어납니다. 버금할 것이 없는 현대사의 정상(頂上)이란 것이 들어납니다.
이상재선생님의 예언자적 기상과 강직한 정신, 그리고 YMCA의 구조 메커니즘, 이 두 엔진이 아말감한 곳에서 비로소 현대 한국사는 그 정점(頂点)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우리가 감동으로 젖는 가장 소중한 현장지침은 우리 민족 운명의 누적된 비극인 분립, 갈등, 증오, 편-가르기를,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성취한 거인(巨人)의 모뉴멘트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실, 특히 정치의 치명적인 갈등과 상살(相殺)을 보면서 그 분의 업적이 자꾸만 높이 보이고 당기고 싶은 것을 뉘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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