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 뉴스서천
  • 승인 2003.01.01 00:00
  • 호수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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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동서양의 차이를 말할 때,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집단문화와 개인문화가 지니는 특성일 것이다.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한 동양에 있어서는 단결과 화합을 덕목으로 가능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유목사회를 토대로 출발한 서양에 있어서는 다수의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어도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함께 생활하는 분위기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인지 분업(division of labor)을 통한 협업이 동양사회보다는 더욱 더 뚜렷하게 정착된 것 같고 평등이라는 개념도 ‘책임 있는 자유’와 함께 확고히 뿌리내린 듯 여겨진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까? 상대방을 존중하며 배려하고자 하는 밑바탕은 서양과 비교해 서로가 유사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추구하는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와 혼돈이 문제화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질서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율이라 일컬어지는 법률 앞에서는 그 누구도 평등하다고 외쳐대면서도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분위기들이 자연스럽게 연출되고 있다거나 평등이라는 명분이 적당히 왜곡되어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위정자와 국민들간의 서열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들 앞에서는 점차 사회를 선도하는 중심층의 권위는 사라져만 가고 그 자리엔 오직 인맥과 지위, 물질만이 채워져 가는 모습이란 실로 심각한 현실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현대사회의 가치관 혼란과 물질만능주의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더욱 더 이에 대한 해결노력은 중요해진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가 불분명해 진다면 불신과 편견, 눈치와 기만, 무책임과 무소신, 아첨과 시기, 모함과 갈등, 복지부동(伏地不動) 등은 더욱 자연스러워 질 것이다. 특히, 자수성가형(自手成家形) 존재가 사회의 중심에 서서 다양한 구성원은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기준에만 맞추라고 강요하게 된다면 이는 심각한 사회적 퇴행이자 불행의 시작이 될 것이다.
2002년이라는 시간이 역사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지금이 세밑이라 그런지 불우이웃을 생각하자는 소리들이 많이 들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요란스럽게 정기적인 행사치레인양 동참하는 부류와 그런 일은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다 하면서 그저 흥청망청 즐기는 부류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희생과 봉사로 늘 조용히 참여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여기에서 나름대로의 실마리를 생각해 보았다. 항상 소외된 계층을 찾아 어루만져 주는 애타주의자(愛他主義者) 부류와 늘 자기 자신의 치밀한 이익과 계산에 의해서만 움직이려는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 부류에서 구분 지어 생각해 볼 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자에 해당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의 시작은 남을 위한다 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챙기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어 진다고 판단된다. 특히, 동양적 집단사회에 익숙해져 온 공리원칙(公利原則)을 내세워 무지막지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추구하는 것 말이다.
올해는 우리 사회가 많은 색다름을 겪기도 하였다. 월드컵 4강 신화 창출이라는 뒷면에 숨어 있던 불신과 갈등을 이겨 낸 감독의 꿋꿋한 지도력을 비롯하여 최근의 대통령 선거 뒷면에 숨어 있던 변화에 대한 계층간 갈망차이까지 말이다. 희망찬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가 중용(中庸)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자기 자신을 숨기기보다는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분위기에서 능력과 소신이 인정받는 책임감 있는 신구조화(新舊調和)가 있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램이 크다.
온전히 남을 위해 희생하지 못할 바에는 또한 남이야 어떠하든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무차별하게 추구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다양성을 이해해 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보다 세련되게 추구할 수 있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생각해 본 것이다.
즉, 내가 좋으면 남도 좋을 것이고 내가 싫으면 남도 싫을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솔직히 받아들여 최소한 남을 위해 희생은 못 할지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 책임 있는 모습과 시간들을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다.
진정 이러한 습관들이 성실히 쌓여진다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는 소신형 중용은 자연스럽게 자리잡지 않을 까도 생각해 본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을 위한 체질개선(體質改善)을 바라며 써 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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