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月南)과 서천과
월남(月南)과 서천과
  • 뉴스서천
  • 승인 2003.01.23 00:00
  • 호수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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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년전 서울에서다. 필자를 포함한 선후배 문인들 네댓이 모여 어느 얘기 끝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때에 필요한 진짜 우리의 참 한국인상으로의 그런 지도자를 뽑자면 누구이겠느냐고 잠시 논의된 일이 있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가 뽑혔다. 필경 <참 한국인상>에 대한 주장에 필자의 입김이 좀은 셌던 것도 같지만 어쨌든 명색이 중견 문인들 네댓이 뽑은 거니까 일반성이 아주 없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 것 말고도 요즘도 세상에서는 유독히 월남을 그런 쪽의 지도자상으로 말하는 말들, 글들이 많다. ‘월남선생은 그의 인격 자체만으로도 조선 민족의 희망이요 의지처였다…’ ―경희대 유도진(兪道鎭)교수―등.
‘생(生)하여 일대의 중망(重望)이 치우쳐 그에게 부쳐지고 사(死)하여 만인의 절통(切痛)이 그에게 기울였다. 갖은 간극(艱棘)의 무서운 시련으로서 옥성금강(玉成金剛)이 된 그의 매절(邁絶)한 인격은 진실로 우리의 암흑을 빛으로 밝혀주고 우리의 냉한을 온기로 덥혀준 궁음(窮陰)의 양광(陽光)이었으니 그만큼 그는 민족의 보물이었다… ―동아일보 ‘월남 이선생의 영이를 보내며’에서―
‘구한국 말로부터 일제에 이르는 반세기 가까운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매력 있는 지도자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월남 이상재를 택할 것이다. 학식으로는 그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그보다 더 출세한 사람, 유명해진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인간의 크기에 있어서는 감히 그를 능가한 인물이 없었다.―연세대 김동길(金東吉)교수의 말―
세상에서는 이처럼 추앙을 받는 분인데도 막상 선생이 태어나고 소년시절 (18세 과거 응시때까지)을 보낸 고구(故丘)인 우리 서천에서는 과연 선생에 대해서 얼마나들 알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다. 필자가 들은 전언(傳言) 하나를 본다. 필자의 향리 면(面)에서 부면장도 지낸 한 후배 친구한테 들은 얘기이다.
그 친구를 포함한 3,4인이 일행이 되어 열차로 서울엔가를 가면서 그 열차내에서 있었던 일이라 했다. 출발역은 물론 서천역이다. 일행 중에는 군내(郡內) 모 기관의 기관장 친구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고 우연히 월남선생이 화제가 되었는데 그 기관장 친구만이 화제에서 빠져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낸 모습이 되어있었다.
열차가 대천을 더 가서 광천인가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창 밖만을 내다 보고 있던 그 기관장친구가 오랜만에 얼굴을 돌려서 일행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월남 월남들 하는데 월남이 뭐요? ”
부면장친구의 전언이란 그것이다. 그 기관장 친구가 누구인가는 부면장이 입을 다물어서 알 수가 없다. “한심한 일이지요? ”가 부면장의 말이고 다음이 필자의 말이었다. “한심한 건 그 기관장이 아니라 우리 군 자체 모두일세. 평소 우리 군 모두가 얼마나 월남선생에 대해서 무관심이었으면 설령 그 기관장이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 해도 그 정도이겠는가? ”
한 예만 더 들어본다. 이번에는 앞의 기관장류가 아니다. 월남 이상재란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밖에 선생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은 그런 지식으로 선생을 욕되게 하고 그나마 모르는 군민을 더욱 오도하고 한 일이다.
얼마 전 서천 군민회관에서 군내 한 여성단체 주최로 월남이 주제가 된 세미나가 있었다. 그곳에서의 일이다. 축사의 청을 받고 필자도 참석한 데서이다. 남성단체도 아닌 여성단체에서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런데 그 모임이 그만 앞에서 말한대로 선생을 오히려 욕되게 하고 한 모임이 되고 만 그것이다. 행사절차 중 가장 중요한 장본이 되는 주제발표자의 발표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선생에 대한 설명이 겉핥기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망명이 없었다, 독립운동이 적극적이지 않았다 등으로 선생을 폄하하고는 “그만큼 선생은 한계가 있는 분이었다”가 그 주제발표자의 말이었는데 그 보다 더 선생을 욕되게 한 말도 그 보다 더 청중을 오도한 말도 없다는 말이다.
그 시절의 독립운동에 3.1운동보다 더 적극적이고 규모가 크고 한 운동은 없다. 선생이 없었다면 그 운동이 없었고 (선생 주도로 남강(南崗)등과 치밀한 사전모의가 있어서 된 운동이다) 선생이 없이는 ‘무저항주의’로 한 그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일인들을 죽여서는 독립이 안되고 우리가 죽어야 독립이 된다”가 그때 운동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으로 해야 된다며 한 선생의 말이었다.
다음 선생은 망명이 없었다 운운에 대해서. 과연 선생은 망명이 없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럼 왜 망명이 없었나? 망명이란 ‘망명도주(亡命逃走)’의 준 말이다. 당시 선생만큼 선생을 아끼는 각처로부터 망명의 권유를 받은 지도자도 없다. 그때마다 왜 거절했나를 다음의 한 예에서만 보면 당시 선생에 있어 망명이 뭔가를 알고도 남는다.
1922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1차 세계 기독교학생 연맹대회에 한국 기독교청년 대표로 월남이 참석한 일이 있다. YMCA 총무 신흥우. 간사 이대위, 이화학당의 김활란, 김필례등 학생을 이끌고였다. 이때가 마침 우리의 상해 임시정부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모스크바 자금 40만 루블 문제등으로 내분이 극도에 달해있던 무렵도 되었다.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등 내각원 대부분이 사퇴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이런 때에 월남이 중국에 간 것이고 그 어느 날 월남은 뜻밖에 임정(臨政)동지 둘을 그곳에서 만난다. 하나는 임정의 의정원장 손정도(孫貞道)이고 하나는 수행한 여운형(呂運亨)이었다. 임정 내분 수습의 요청을 위해서 온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당시는 임정 수반이 주석이 아닌 대통령이었다. 전 각료의 요청이라며 그것을 맡아달라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그때 월남은 둘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까지 조국을 빠져나오면 동포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소? 여기 일도 중하지만 조국의 동포가 더 중하오. 나는 돌아가서 그들과 같이 있어야 되오.”
“망국 후 무기력한 조선인에게 생기와 용기를 준 자가 월남 외에 누구이냐”1927.4.7일자 동아일보 ‘월남 선생의 영여 나간다’ 라는 제의 글에 있는 송산(松山)의 말이다.
“당시 선생이 망명하려면 전국민 모두를 이끌고 갈 수 밖에는 없다”가 어느 자리인가에서 필자가 한 말이다.
실로 월남이 이런 선생인데도 선생과 고장이 같은 우리 서천에서는 선생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앞의 일들을 겪고 나자 더욱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필자의 생각이다.
<박경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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