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세우는 뜻
학교를 세우는 뜻
  • 뉴스서천
  • 승인 2003.03.13 00:00
  • 호수 1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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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귀 따갑게 들린다. 학생들이 학교는 졸업장을 따기 위한 의례적 통과코스쯤으로 알고 있고 정작 공부하는 곳은 사립학원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교사들도 학생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반쯤은 포기한 상태요, 학부형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나. 자식을 학교에 맡기고 돈만 내면 다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어서 학원이다, 과외다 이리 휘둘리고 저리 내몰려 정신이 없다고 한다.
정부 역시 다를 바 없다. 조령모개 처럼 자꾸 정책만 바꿔댈 뿐 묘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자 급기야 일이 터졌다. 학생들의 해외러시가 그것이다. 다른 나라에 가서 금 쪽 같은 아들딸을 교육시키겠다는 부모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학교가 죽은 데에는 무엇보다 먼저 교육의 본질을 왜곡한 데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인들처럼 자녀교육에 열심이었던 국민도 세계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못 배웠어도 자식만은 가르치고 말겠다는 비원(悲願)이 한국인들의 뼛골 깊이 자리잡았다. 소 돼지 팔고 논밭을 처분하면서 자식을 상급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런데 여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그 교육의 열심이라는 게 입신출세라는 다분히 비교육적인 동기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입신출세는 공익정신이 존중되지 않은 개인주의 내지는 가족주의적 발상이다.
이러한 교육의 본질적 왜곡은 학벌주의를 낳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입시 위주의 교육이 판을 치게 되었으며, 학교는 입시학원처럼 변질되어갔다.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성스러움은 온데 간데 없어진 반면에 얄팍한 시험기술만 맹위를 떨쳤던 것이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 학교 경시로 나타났다. 학교는 교육적 주고받음이라는 시장기능을 띠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느 시장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곳이다. 거기는 교육내용을 주고받는(혹은 사고 판다 해도) 행위보다 상위의 역사, 곧 인간이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필수적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그래서 엄숙한 주체다. 지식과 각종 기술(art)의 습득도 결국은 인간다움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났을 때는 해악으로 자리 매김 할 뿐이다. 성성(聖性)을 묻는 소이가 게 있다.
무슨 일이든 본질 확인작업이 귀찮고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것 같아도 반드시 충실하게 지켜져야 탈이 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편의주의와 졸속주의가 그것을 백안시해오는 바람에 아파트가 무너지고 다리가 내려앉으며 지하철이 화마로 변하듯 학교를 무너지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늦었다고 할 때가 출발의 최적 시점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부터 교사 학부형 학생 사회인 할 것 없이 모두 일어나 교육의 본질을 찾아 나서야 한다.
히브리어로 교육을 하눅카라고 하는데 그 말에서는 두 가지 뜻이 들어있다. 하나는 교육이요 또 하나는 봉헌이라는 의미다.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하면 교육은 가르침이요 드림이다. 다시 말하면 가르침의 목적이 봉사며 봉사의 가능성은 가르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공공성이 밝히 드러나는 말이다. 귀 기울여야할 터이다.
그렇다. 교육이 제대로 되면 우리 사회에 만연된 유사공공성 같은 것은 얼씬도 못한다. 그래서 교육입국이라는 표어가 무색하지 않다. 그러려면 교과학습의 주체인 학교를 살려야 한다. 문화학습만으로 교육의 성과가 달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생명체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장기간 교육 받아야하는 특수한 존재다. 우리 모두 학교를 살리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내가 시골의 학교들이 통폐합 또는 폐교되고 있는 마당에 막대한 경비를 들여 굳이 학교를 새로 세우는 까닭은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여 학교다운 학교를 보여주자는 데 있다.
<칼럼위원/ 김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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