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타고 있는 설국열차
우리가 타고 있는 설국열차
  • 양선숙 칼럼위원
  • 승인 2014.12.23 10:37
  • 호수 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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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숙 칼럼위원
이틀 동안 서해안을 뒤덮은 눈으로 10cm가 넘는 흰머리를 얹은 세상이 느리게 돌아간다. 자동차도 엉금엉금 사람들도 조심조심, 빠름빠름의 일상이 정지된 듯 보여진다. 발이 시려운 건지, 눈밭이 좋은 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철물점 흰둥이만 제 속도를 낼 뿐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자니 지구촌 어린이들의 마음을 빼앗은 “Let it go”의 겨울왕국이 생각나 잠시 동심으로 돌아간다. 입 벌려 받아먹던 눈송이, 스키 부럽지 않던 비료포대 썰매, 젖은 신발과 장갑, 바지 말린다며 들이밀던 모닥불이 저만치 타고 있다.

유년의 즐거운 때만 생각나면 좋으련만 한창 시끌시끌한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며 땅콩리턴의 조현아 사건과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 터져 나온 통합진보당 해산 명령의 씁쓸함 때문에 또 한 편의 영화가 생각난다.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냉각을 시행한 인류에 부작용으로 빙하기가 닥쳐온다는 배경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짐승같은 삶의 꼬리칸을 지나면 생명의 유지를 위한 식수와 식품칸이 나오고 윌포드는 위대하며 기차만이 살 길이라 세뇌당하는 학교를 지나 마약과 환각에 취한 일등칸, 마지막으로 세상과 단절된 지도자 윌포드가 살고 있는 엔진룸의 설국열차.

빙하기가 오자 돈 있는 사람들은 윌포드의 기차에 오르고 티켓에 따라 정해진 자리로 1001칸의 기차 안에는 삶의 서열이 정해진다. 그 세계에 있어 무임승차한 꼬리칸의 사람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74%의 기차안 생태계의 적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여버릴 수 있는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꼬리칸은 군대의 억압과 폭력으로 통제할 뿐 커뮤니케이션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자들은 “모두가 배정받은 제자리가 있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질서”라며 무쇠로 굳게 닫혀진 문은 결코 그들에게 다음 칸을 허락하지 않는다.

빙하기로 얼어붙은 인류 중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인류인 기차는 분명 인간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똑같은 궤도를 17년째 달려온 기차의 바깥 세상은 빙하기가 지나 서서히 녹고 있음에도 기차만이 살 길이라며 세뇌와 폭력, 불평등으로 체제 유지에만 몰두하고 있다.

문은 열려야 한다. 문은 차단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열기 위해 존재한다. 앞 칸과 뒤 칸을 넘나들고, 안과 밖을 연결하는 것이 문이다. 설국열차의 문은 모든 것을 단절하고 폐쇄하므로 결국 갈등과 분노에 불이 붙어 파괴되고 만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함에도 국가 체제를 유지한다는 명목과 집권자들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국민의 존엄성과 인권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다. 지나온 역사에서 보듯 짓밟히고 분노한 민심은 도화선에 불이 붙는 순간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 타락을 알면서도 오직 기차가 달리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 엔진룸에 갇혀있는 단절된 지도자는 환영받지 못한다. 인간애의 뜨거운 가슴으로 엔진룸의 닫혀진 문을 열고 다음 칸, 그 다음 칸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타고 있는 설국열차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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