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
[모시장터]
  • 김환영 칼럼위원
  • 승인 2015.02.16 13:13
  • 호수 47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화야, 힘을 내!

지난 1월, 그림쟁이 다섯에 귀농한 이들 셋 해서 네팔과 인도 몇 곳을 돌게 되었다. 80년대에 만나 함께 활동했던 화가들, 그리고 이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진 이들이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애당초 나는 여행의 목적도 계획도 없었다. 그저 예정된 일이었고, 그래서 갔다. 하지만 ‘럭셔리한 관광’과는 거리가 먼 이번 배낭여행은 쉰을 훌쩍 넘기고 있는 일행 모두에게 제법 버거운 것이었다.

네팔 쪽 히말라야의 한 자락인 푼힐 전망대를 등정하고 인도로 넘어가는 동선이었는데, 푼힐은 해발 3210m의 고산에 쌍지팡이를 짚고도 아주 느리게 올라야 하는 시종 단단한 돌계단 길이었고, 인도 대부분의 거리는 지독한 매연으로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고 종일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소리들은 귀를 찢을 듯이 고통스러웠다. 

출발하기 전, 일행 가운데 한 명이 히말라야 등정 기념으로 플래카드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내 몫으로 떨어졌다. 대개는 이미 한두 가지씩 역할을 맡고 있어서 나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급하게 가로 3m에 세로 2m 정도의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머무는 곳마다 배낭에 들어있던 플래카드를 꺼내었다. 

지난 해 4월 이후 내 머릿속은 정말이지 국가로부터 제대로 구조조차 받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다 속에서 죄 없이 죽어가야 했던 이들과 제주로 봄 소풍을 떠나다 수장된 생때같은 어린 학생들로 들끓었다. 더구나 300여 일이나 지난 지금까지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한해의 전부를 짓눌려야 했다. 나는 자연스레 세월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 바닷물에 잠긴 배 한 척 위에 ‘평화야, 힘을 내!’라는 커다란 글씨를 쓰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노래한 존 레넌의 <이메진imagine>의 한 구절을 화면 위쪽에 영문으로 박았다.

첫 번 째 숙소인 네팔 카트만두에서 처음 플래카드를 펼쳤을 때, 정신없이 만든 거였지만 일행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해주었다. 그리고 세월호에 관한 퍼포먼스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푼힐 정상에 올랐을 때, 우리는 해돋이 시간에 맞추어 전망대 철탑에 플래카드를 묶고 세월호 희생자들의 재생을 꿈꾸며 제를 올리고 퍼포먼스를 했다. 인도로 넘어갔을 때에도 갠지스 강가의 한 가트에서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다.
두 번의 퍼포먼스 과정에서 우리는 세 명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첫 번째 만난 젊은이는 네덜란드 국적의 공학도였다. 푼힐 전망대의 중턱쯤에 있던 한 식당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배낭에 넣어둔 플래카드를 꺼내 볕이 잘 드는 벽에 내걸고 새까맣게 그을린 그 집의 네살박이와 놀고 있었다. 산 아래를 보며 혼자 점심을 먹던 외국인 이 식사가 끝나자 벽에 걸린 플래카드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2014년 4월16일 한국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건에 대해 손짓발짓을 해 가며 설명을 했고, 이미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네팔의 짐꾼 한 명이 열정적으로 설명을 보태주었다. 우리는 무언가에 쓸 요량으로 네덜란드의 젊은 공학도에게 세월호 사건에 대한 영문 글을 부탁했다. 그는 몇 개의 문장으로도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영문으로 명확하게 밝혀주었다.

두 번째 만난 젊은이들은 한국인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이들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시작한 젊은 여성과 철학과 4년에 재학 중인 여대생이었는데,  일행 가운데 한 명이 이들의 배낭에 매달려 반짝거리던 ‘노란리본’을 보고 말을 붙인 거라고 했다. 저녁때가 되자 이들은 선뜻 우리 방으로 와주었고, 일행과 술도 한 잔 하면서 여행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그 가운데 한 명이 다음 행선지인 푼힐 전망대에 오르면 펼쳐 보이려고 준비했다는 작고 귀여운 플래카드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새해를 맞이하며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많은 소원들이 적혀있었다.

우리는 플래카드를 꺼내어 방 한쪽에 펼쳐 보이며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퍼포먼스의 얼개를 두 젊은 여성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청년이 영문으로 써준 손 글씨를 보여주었다. 이튿날 저녁, 젊은 아가씨들은 기꺼이 바라나시의 80번째 가트인 아씨가트에 나타났다.  아씨가트는 전날 밤 우리가 두 번 째 퍼포먼스를 약속했던 장소였다. 

갠지스강가로 저무는 저녁놀을 구경하러 나왔거나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군중들이 낯선 동양인들의 행동에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와 언어가 다른 인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퍼포먼스 뒷부분에서는 반복해 영문을 낭송하기로 했는데, 이 일을 철학 전공인 여대생이 해주었다. 퍼포먼스에 사용한 노란 천을 뭉쳐 들고 나란히 서서 군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을 때, 군중 가운데 키 크고 뿔테안경을 쓴 한 인도인이 우리에게 영어로 몇 가지를 더 물어왔다. 그러자 수십 명의 군중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그이에게서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한 무언가를 묻는 것 같았다. 영어를 알아듣는 이는 뿔테안경을 쓴 한 사람뿐이었던 거였다. 나는 길거리에서 군중들이 몸에서 몸으로 전하고 있는 무언가를 감동스럽게 지켜보았다. 제 나라 말로 설명을 다시 들은 군중들이 우리를 보며 엄지손가락들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바라나시의 군중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환하게 손을 맞잡았다.

아무 예정에 없었던,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이러한 행동이 이역만리에 사는 인민들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는 알 수 없다. 얼마만큼 전달이 되었는지도 우리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림쟁이인 나로서도 처음으로 퍼포먼스라는 걸 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동안 가슴 속 깊이 짓누르던 무엇에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그럴 거였다. 우리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저 숫한 거짓된 것들의 강요된 요구처럼 ‘가만히 있는’ 일 자체였을 것이다.

‘세월호 인양과 실종자 수습 및 진상규명 촉구를 위한 세월호 가족 안산ㅡ팽목항 도보행진’이 이달 14일이면 팽목항에 도착한다고 한다. 꿈조차 피워보지 못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자식과 부모를 잃은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아무리 해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살아남은 우리에게 세월호 사건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의 시작은 아니겠는가.

(김환영 칼럼위원은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동화 《종이밥》 《마당을 나온 암탉》 《과수원을 점령하라》 《해를 삼킨 아이들》, 그림책 《나비를 잡는 아버지》 《호랑이와 곶감》, 어린이 시집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 장편만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많은 책에 그림을 그렸고, 동시집 《깜장 꽃》을 냈다. 지금은 보령 미산면의 한 골짜기 마을에서 그리고, 쓰고, 농사를 지으며 산다.  beettle@hanmail.net. 편집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