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소시지와 프로스펙스
비엔나 소시지와 프로스펙스
  • 양선숙 칼럼위원
  • 승인 2015.05.04 17:34
  • 호수 7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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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기억 대부분이 넉넉지 않던 집안 형편과 맞물린 아픈 기억이지만 시간은 그 마저도 추억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은 대도시 변두리였다. 보문산 자락 솥점말이라는 촌스런 이름을 가진 동네였다. 남편이 집에서 놀고 아내가 일터에 나가는 가정이나 맞벌이 가정이 많았다. 우리 집도 아버지의 벌이로는 5남매를 키우기 버거웠기에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어머니는 일터에 나가셨다.

살림만 하던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를 따라 일당이 높다는 공사장 페인트공으로 일하셨다. 얌전하신 어머니가 자존심을 버리고 나서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 매일 밤, 밀려오는 통증으로 끙끙대시는 어머니의 팔, 다리를 주무르며 나는 일찌감치 애어른이 되었고 엄마 바보가 되었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지도, 그 흔한 주산학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국민학생의 필수품 전과(全科)도 가져보지 못했고, 사춘기 여고생 때는 수업료를 제 때 못내 서무과에도 몇 번씩 불려가곤 했다. 심지어 대입시험에 합격해 놓고도 고생하는 엄마 생각에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는 꽃무늬 원피스나 투피스를 입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점심 시간에는 그 친구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는데 도시락 반찬통을 열기가 무섭게 동이 나 버렸다. 나는 그 때 처음 비엔나 소시지를 먹어봤다. 살색 소시지가 전부였던 내게 그 맛은 신세계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첫 봉급을 받고 마음껏 사먹었던 게 바로 비엔나 소시지였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도 내 장바구니에는 비엔나 소시지가 끊이지 않았다. 비로소 몇 해 전에야 비엔나 소시지에 대한 애착을 털어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어머니가 사다주신 의복을 입었다. 청바지에 티셔츠가 전부여서 가릴 것도 없었지만 내가 제일 곤혹스러웠던 것은 신발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상표가 프로○○○, 나○○  등이었는데 우리 집 형편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문제는 어머니가 사 오시는 운동화가 유명 상표를 모방한 짝퉁이었다. 프로○○○에 직선이 하나 더 있거나, 나○○의 꼬리가 살짝 구부러져 있는......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 운동화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유명 상표가 뭔 지도 모르시는 눈치였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나는 한 번도 불평하거나 떼를 쓰지 못하고 짝퉁 신발을 신고 다녔다. 어른이 된 지금은 유명 상표 신발을 신고 다닌다. 예전보다 많아진 상표 중에 어릴 때 신어보지 못한 그 상표를 유독 좋아한다.

이런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이었지만 유년 시절을 추억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바로 어머니 때문이다. 아침마다 “우리 강아지, 키 커라 우쭈쭈”하시며 팔 다리를 주물러서 잠든 나를 깨워주셨는데, 어머니의 매만짐은 지금까지도 따스함으로 자리한다.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게 컸지만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만큼은 부족하지 않았다.

몇 해 전 어머니가 “용돈 많이 못줘서 미안하고, 학비 제 때 못 내줘서 미안하고, 대학교 못 보내줘서 미안하다”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미 삶으로 받아들이고 잊었던 일들을 어머니는 잊지 못하고 가슴 켜켜이 안고 계셨다. 고단한 삶 속에서 사랑 많이 줘서 고맙고, 고등학교까지 가르쳐줘서 고맙고, 지금도 살아 계셔줘서 고맙다고 몇 번을 얘기해도 못해 준 것만 생각나는 어머니이시다.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흘러 내게로 왔다. 약자를 보면 안쓰러워 섬기고 싶은 마음과 사람살이의 소중함을 아는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누리지 못한 것은 많았지만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키워주신 어머니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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