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에 빠진 복지논쟁의 함정
‘무상’에 빠진 복지논쟁의 함정
  • 조동준 서천군의회의원
  • 승인 2015.07.13 14:31
  • 호수 7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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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실린 한경석씨의 ‘무상급식을 통해 본 복지논쟁…에 대한 반론은 서천군의회 조동준 의원이 보내왔습니다.<편집자>

결론부터 말하면 국가(자치단체 포함)가 시행하는 모든 복지는 ‘무상’이 아니다. 국가가 시행하는 공적영역의 복지 재원은 국민의 세금을 통해 만들어진다. 다시말해 국가의 복지는, 국민이 낸 세금을 통해 만들어진 재원으로 국가가 국민에게 정당히 제공해야 하는 대가라는 것이고, 이것이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현대국가의 의무이라는 점에서 볼 때 국민이 공짜를 바라는 것처럼 몰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또 하나의 결론은,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 모든 부문의 복지를 모든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제공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그런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정치공세이거나 복지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복지정책의 큰 골격을 이루는 것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국기법)’이다. 이 법은 공공부조(公共扶助)를 규정하고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하나이다. 근현대 국가에서 복지가 제도화되며 나타난 공공부조 정책의 일환인 것이다. 예전 ‘생활보호법’이 97년 IMF위기를 거치며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에 제정해 지금까지 오고 있다.

저소득 국민에게 국가가 생계·교육·의료·주거·자활 등에 필요한 경비를 주어 최소한의 기초생활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줄 목적으로 제정된 법이다. 이 법에서는 과거의 영세민이 아닌 ‘수급자’로 칭하며, 생활형편에서 기초수급자보다 좀 더 나은 ‘차상위계층’에게는 선별적으로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당연히 차상위계층에도 포함되지 않는 일반인에게는 이 법에서는 복지 혜택이 제공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다. 장애인복지, 영유아복지, 노인복지 등 거의 모든 분야의 복지가 특정 대상과 경제형편, 부양능력 등에 따라 선별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굳이 사회복지 역사에서 무슨 ‘선별주의’와 ‘보편주의’가 오래된 이론으로 대립해온 것처럼 호도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최소한 무상급식과 같은 사회정책이 모든 구성원에게 동일한 복지혜택으로 공여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고 이를 보편적 복지의 발로이며, 국가 재정의 파탄까지 갈 것이라 논리를 확장하는 것은 ‘침소봉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상인 복지와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복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하나 재원의 문제로 복지의 확대를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다. 재원의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증세를 통한 세원의 확대와 예산 사용의 적정성이 그것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시작된 부자감세는 박근혜 정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등으로 수십조의 재정을 쏟아부어 박정희 정권 이후 보수정권의 성과로 인정받아 왔던 건전한 국가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고 있다.

단적인 예로 14년도 세수 결손은 10조9000억원에 이르는데 이는 IMF 직후인 98년 8조6000억원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세금이 걷히지 않다보니 빚으로 나라살림을 꾸릴 수밖에 없었으며 재정수지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국가채무가 노무현 정부에서 10조9000억원 늘어난 반면 이명박 정부에서는 98조8000억원 증가하던 것이 박근혜 정부에서는 2년만에 82조3000억원이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2007년 299조원 이던 국가채무가 15년에는 570조원이 될 것이라 전망이다. 이를 매우기 위해 결국 이 정권이 하는 것이라고는 서민의 피를 빠는 서민증세로 담배값 인상, 근로소득세 부담 증가(연말정산 대란) 등을 궁여지책으로 하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복지의 확대보다 경기부양을 위해 재원을 써야 한다고 하는 과거의 성장론에 사로잡힌 점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국가 재정 건전성을 얘기하며 부자감세 철회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자와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이를 옹호하면서 무상급식과 같은 사회정책을 마치 국가 재정을 파탄내는 보편적 복지의 독버섯 마냥 치부하고 마치 가난하고 못사는 이들을 위해 복지 혜택을 선별하자는 모순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의 허구성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유럽의 사회주의(이념적으로 공산주의와 매우 다름) 국가에서 복지를 확대해 온 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한다.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매우 허구이다. 우리의 복지 수준은 소위 OECD 국가 중 최하위이다. 심지어 개발도상국보다 적은 수준이며 현재 확대되는 수준 또한 유럽의 복지국가에 비하면 한참 격차가 있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우리의 복지는 그렇게 할래야 할 수 없다. 조세저항이 매우 크고, 사회의식이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점이 큰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 과거처럼 재벌수출대기업이 주도해서 낙수효과를 바라는 구태한 성장 담론으로는 미래가 없다.

오히려 “일하는 사람이 먼저 살아야 기업도 살고 나라도 사는 법”에 대해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성장론으로서 세계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소득주도성장론’이다. 예를 들면 ‘임금상승(복지확대)->가계소득 증가->내수 확대->기업성장->일자리 확대->경제성장’이라는 소득분배와 성장이 선순환하는 구조의 분수효과를 바라는 것이다.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몇 개의 기업이 지역의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 오히려 주민의 보편적 삶을 개선하고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사회정책을 확대함으로써 질적 성장을 만들어야 한다. 어딘지 모를 기업 유치를 위해 몇백억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지역의 중소상공인과 농어업인들의 지원 확대로 내수 경기를 부양해야만 한다.

아무튼 어설픈 ‘복지논쟁’은 또 하나의 이념적 공세, 그 이상이 아니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토론을 통해, 국가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따져볼 요량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만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과거의 성장론에 파묻혀 복지의 확대를 뜬금없는 공산주의와 결부시키기까지 하는 논리는 상식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기회가 된다면,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좀 더 깊은 토론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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