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이야기
벼루 이야기
  • 신웅순
  • 승인 2015.09.25 21:11
  • 호수 7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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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벼루 하나 장만했다.
벼루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요 벼루에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거금을 주고 사게 되었다.
며칠 전 제작을 했다기에 제자와 함께 감상하러 갔다. 명장이 제작한 것이라선지 한눈에 보아도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40년 전에도 벼루를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어디에다 쳐박아두었다. 지금도 천덕꾸러기 신세로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벼루는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돌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 있을까. 먹을 가는 소리는 눈 내리 듯 소리 없고, 촉감은 아기 살결이 듯 부드러웠다. 먹물엔 머언 하늘이 비치고 둥둥 떠가는 흰구름도 비쳤다. 밤이 되면 구만장천 달도 비칠 것이다.
  벼루명을 무엇으로 할까. 추석연(秋石硯)으로 하자. ‘추사 김정희를 따르는 석야 신웅순의 벼루’라는 뜻이다. 
  추사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중국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학자이며 서예가인 운명의 두 스승 완원과 옹방강을 만났다.
  추사는 완원으로부터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얻었고 옹방강으로부터는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얻었다. 추사는 ‘완당’이란 편액을 ‘보담재’라는 자신의 서재에 내걸었다. 완원을 흠모하고 옹방강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추사는 이 두 분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추사를 스승으로 삼아 뒤를 잇고 싶다는 나의 당찬 꿈이었다. 한문에는 추사요 한글에는 석야라는 그런 꿈을 말이다. 이런 꿈도 꿀 수 있어서 행복했다.
  1973년 <월간서예>창간호 맨 뒷장에 ‘앞으로 내 글씨의 수준으로 평가하리라.’ 1973년 11월 8일 나의 결심이 써 있었다.
  그 동안 학문을 하면서도 그 생각만은 내 가슴 속에 뜨겁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만 40년의 세월을 훌쩍 넘고 말았다.
  정년이 2년도 남지 않았다. 이제야 실천할 때가 된 것 같다. 철모르는 젊었을 때의 일이었으니 가당키나 했을까만 그래도 그 결심 때문에 지금도 꿈을 꾸고 있으니 행복하다.
일필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쁨
      이 벼루를 ‘추석연’으로 명명하다
      2015.9.5.석야

이순의 나이에 나의 꿈을 벼루에 새겼다. 그 날 제자들과 벼루를 감상하고 저녁 늦게까지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다.
이 벼루에 먹물을 갈면 무엇이 비칠까.
내가 비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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