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 참죽나무 꿈
[모시장터] 참죽나무 꿈
  • 김환영 칼럼위원
  • 승인 2015.12.14 17:07
  • 호수 7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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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환영 칼럼위원
아랫집 노인이 집 둘레에 서있던 나무를 몽창 베어냈다. 주인도 아닌 사람이 주인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앞집 터에 서있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낸 것이다. 잠결에 웽웽거리는 엔진톱 소리에 놀라 나갔을 때엔 이미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 가운데에는 내가 그토록 아끼던 참죽나무도 섞여 있었다.

벌목꾼들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며 왜 나무를 베어내느냐고 따졌다. 그 서슬에 순간 엔진톱 소리가 멈추었다. 그러자 벌목꾼 한 명이 어디론가 내려가더니 아랫집 노인과 함께 올라왔다. 노인이 다가와 무슨 일 있느냐며 얼굴을 들이대었다. 나는 갑자기 할 말이 궁색했다. 그동안 길 문제로 물 문제로 노인과 사이가 나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땅주인도 나무 주인도 아니었으니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내 사정은 이러했다. 나는 베어진 참죽나무를 이사 와 하루도 빠짐없이 보았고,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곧게 뻗은 참죽나무 둥치에 부리를 찍으며 오르던 딱따구리들을 가까이에서 엿볼 수 있다는 건 흐뭇한 일이었다.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휩쓸리며 가로등 불빛을 미친 듯이 흔들었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것만 같았다. 맑은 날 밤이면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별들이 열렸고 그것은 무척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앞마당이 낡은 블록으로 콱 막혀 있고, 낡은 축사만 잔뜩 늘어서 볼품없는 이 마을에, 참죽나무는 내가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본 참죽나무의 여러 정경들을 모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따위의 이야기를 전할 수도, 노인이 내 말을 받아들일 턱도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다만, 노인의 난방연료가 나무라는 점이었다. 노인은 일을 마치면 어김없이 나무를 한 짐씩 지고 내려오곤 하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고개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수 없이 나는 나무 한동가리라도 사겠다고 했고 참죽나무의 가장 굵은 밑동을 돈을 지불하고 샀다. 노인은 이제 일 없다는 듯 떠났고, 벌목꾼들은 베어낸 나무들을 토막내 차곡차곡 차량에 옮겨 싣기 시작하였다. 

참죽나무가 그렇게 앞집과 우리 집 경계에 누워 있다. 대관절 나는 저 나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무를 켜서 그림 그리는 작업대를 만들어 볼까. 그러면 참죽나무의 그루터기와 작업대가 된 부분이 이어진 느낌이 들까. 그러면 참죽나무도 나도 조금은 덜 서운할까. 함께 겨울을 나던 때를 나라도 좀 떠올려 볼 수 있을까?

나무를 사놓고도 옮기지 못한 까닭은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네 가구가 전부인 이 골짜기엔 그나마 칠, 팔십 세 노인뿐이다. 그래서였을까, 누워 있던 참죽나무가 꿈에 보였다. 비바람 맞히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용을 쓰며 나무를 움직여 보았다. 어쩐 일인지, 나무는 너무나 가벼웠다. 혼자 어깨에 들어 올리는데 나무 무게를 거의 느낄 수조차 없었다. 이상하게 여기며 무릎을 꿇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무 속이 거의 다 썩어 있었다. 심재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보니 참죽나무의 벌건 속이 묻어 나왔다. 얼른 나무를 옮겨놓아야겠다. 그래야 무참한 꿈을 더는 꾸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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