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틀 함께 40년 외길, 전주병씨
재봉틀 함께 40년 외길, 전주병씨
  • 김장환 기자
  • 승인 2016.04.04 17:47
  • 호수 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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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보령 유일한 재봉틀 수리 기술자

▲ 재봉틀 앞에 앉아 있는 전주병씨

“빨간 꽃 노란 꽃 꽃밭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이 노래는 1980년대 활동하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불러 한때 유행했던 ‘사계’의 한 구절이다.
반복되는 가사와 경쾌한 음악에 빠져 한때 좋아했던 이 노래는 봄이 오고 가을이 가도 재봉기에 않아 밤을 새던 공장 노동자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미싱의 본뜻은 재봉틀(sewing machine), 또는 재봉틀이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해서 그런지 지금껏 미싱(ミシン)으로 부르고 있다.
유행에 따라 옷을 입고 헤어지면 버리는 요즘 학생들이 재봉기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입던 옷을 줄여 형이 입고 동생에게 물려주던 가난한 시절에 재봉기는 각 가정에 필수품이었고 신부가 구입해야 하는 혼수품으로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중년들에게 재봉틀은 아련한 추억이고 어머니의 따뜻한 정이 담긴 그 이상의 이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미싱 고쳐요~”하며 돌아다니는 재봉기 수리 기술자들을 보면 “요즘 누가 미싱을 사용하나?” 의문이 들지만 지금도 세탁소나 광고사, 홈패션 매장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재봉기다.

▲ 신문에 난 손자 자랑을 하고 있는 모습

서천군에서 재봉기를 사용하다 고장 났을 때 찾는 이가 정해져 있는데 그는 40여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전주병(66)씨다.
지난 31일, 종천면 종천리에 거주하는 전주병씨를 찾았을 때도 “미싱이 고장 났으니 속히 와서 고쳐 달라”며 세탁소에서 급하게 그를 찾는 전화가 왔다.
전씨는 전화를 끊더니 “미싱을 사용하는 곳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하루에 한 두건씩은 전화가 온다”며 “서천과 보령에서 미싱 수리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이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한번 수리를 해주면 평생 단골손님이 된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전씨는 젊었을 때 대전에 있는 재봉틀 제작공장에서 일하다 지난 1982년, 고향 종천으로 내려와 서천에 있는 드레스미싱상회에서 10년을 근무했고 이후 개인 사업체를 운영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
요즘 재봉틀을 사용하는 곳이 많지 않아 “재봉기 기술자로 평생을 살면서 후회한 적이 없냐?”는 질문에 전주병씨는 “무일푼으로 살림을 차려서 논과 밭을 사고 고향에 집을 짓고 4남매 다 대학에 보냈는데 무슨 후회냐”며 “아직도 나를 찾는 이들이 있어 삶의 재미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들과 손자들이 나를 닮아 손재주가 좋다”며 서랍장 안에 꼭꼭 숨겨둔 신문을 꺼내 보여준다.
지역신문에는 지난 2011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화제가 됐던 충남조선공업고등학교 졸업생 전성현 학생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서천에서 전기 기술자로 성실히 살아가는 아들과 전국대회에 우승하고 국제대회까지 출전한  전성현 손자가 그에게는 커다란 자랑이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해 주는 희망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현재 비인향교 감사로, 누리산악회장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전주병씨는 “40여년 간 미싱 기술자로 살아온 것에 대해 후회는 없고 힘이 다하는 날까지 이 일을 놓지 않을 생각”이라며 “혹 미싱을 구입하거나 미싱 기술을 배우고 싶은 이가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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