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미학
죽음의 미학
  • 뉴스서천
  • 승인 2003.08.15 00:00
  • 호수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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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죽음이라도 그것은 나를 감소시키나니’

부패한 로마 귀족사회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한 총명한 노예 스파르타카스(영화)가 전투에 임하면서 “귀족의 죽음은 쾌락의 종말이지만, 노예의 죽음은 고통의 종말일 뿐.”이라며 방탕한 로마의 귀족을 향해서 쏘아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종말이요 신이 내린 영원한 안식이다. 또한 미완성인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영원한 자유를 얻는 이 죽음을 사람들은 왜 그토록 두려워할까?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이를 때의 고통이 두려울 것이리라.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되고 있지만, 지금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끝없는 욕구를 채우고자 한다.
과연 이러한 태도가 현명하다 할까?
옛날 서양에서는 교회 근처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묘지를 설치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장례식이나 무덤을 자주 접하게 하여 당신도 죽으면 저렇게 한 줌의 흙이 되니, 너무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또한 옛날 이집트에서는 축제나 잔치 중에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다 사람의 해골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 먹고 마시는데 정신을 다 쏟지 말고, 이 흥청망청한 시간에도 언뜻 죽음의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일 것이다.
“매일 매일을 너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의 삶이 은혜로 가득할 것이다.”
철학자 호라티우스의 말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를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한번쯤 죽음의 문제를 묵상해 본다면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자살 행위는 인간에게만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자살하는 사람이 1년에 1만3천명이 넘는다고 하니 교통사고 사망보다 많은 숫자다. 유명 인사들의 자살 사건을 보면 만감이 교차할 때가 있다.
지난번 정몽헌 회장의 비극적 죽음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 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 많은 재산과 명예도 버리고 개성공단, 남북 경협, 금강산 관광 등 민족의 역사적 과업에 손을 떼고 어떻게 홀연히 떠날 수 있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도
그것은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냐고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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