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8주년 기념 특집/월남 이상재 선생과 헤이그 평화회의③헤이그 하늘에 나부낀 태극기(특사들의 활동)(최종회)
■창간18주년 기념 특집/월남 이상재 선생과 헤이그 평화회의③헤이그 하늘에 나부낀 태극기(특사들의 활동)(최종회)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7.10.25 17:26
  • 호수 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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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참석 못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선언문 배포평화회의 취재 국제기자단과 회견…일제 만행 낱낱이 고발

 

▲ 헤이그 이준열사 기념관. 1907년 당시 특사들이 머물던 호텔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헤이그밀사사건’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는 일본인들이 시각이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받은 특사였으며 이들은 대한제국의 대표단이었다. 비록 회의장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이들은 장외 활동을 통해 강도 일본의 만행을 온 세계에 고발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치질서 속에서 이같은 외교적 노력을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모한 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 사건으로 국제정치질서의 내막을 명확히 알게 되었으며 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헤이그에서 특사들은 어떤 활동을 했늕 알아본다.<편집자>

 

◇호텔에 태극기 꽂고 활동 시작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개회일인 6월 15일보다 약 10일간 늦게 헤이그 회의장에 도착한 특사들은 6월 25일 드용호텔(현 이준열사기념관)에 숙소를 정했다.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한지 60여일 만이었으며, 6월 4일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후 11일만이었다. 이들이 10일 늦게 도착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회의 준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준열사기념관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1907년 5월 9일부터 감시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특사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할 때까지 이들 중 누구의 이름도 거론되지 않았다. 특사들의 치밀한 계획과 실행을 읽을 수 있다.

헤이그 시내의 각국 대표들이 묵고 있는 호텔마다 그 나라의 국기가 걸려있었다. 우리 대표들이 머문 드용호텔에도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고 당시 네덜란드 신문이 보도했다. 당시 일본 대표단을 수행하며 평화회의를 취재하던 오사카 <마이니찌 신문> 기자도 “헤이그의 한국 대표들의 숙소에 태극기가 나부낀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헤이그에서의 한국 독립 선언

▲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한 독립호소문(이준열사기념관 전시)

특사 일행은 26일 아침 서둘러 평화회의 장소로 달려가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회의 참석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의 사무국은 한국 대표들의 입장을 불허했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세계에 공포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대신한다고 선전했기 때문이었다. 평화회의도 이를 인정해 한국 대표들의 입장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특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활발한 장회활동을 펼치며 일본의 부도덕성을 세계에 알리고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세계에 선언했다. 한국 특사들은 1907년 6월 27일자로 참석한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했다. 프랑스어로 작성한 이 문서의 작성일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헤이그에 도착하기 이전에 특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내 학계에서 ‘공고사(控告詞)’라고 하는 이 글에서 특사들은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승낙없이 행동을 취했다.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하여 무장 병력을 사용했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국가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고 폭로했다.

특사들은 이 호소문을 네덜란드 수석대표인 드 보포트 부의장을 방문해 전달했다. 이를 전달받은 드 보포트는 7월 3일 일기에서 “한국대표들의 호텔을 찾아가 면담하기를 원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가 우리 대표들이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왔으나 마침 우리 대표들이 외부 활동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축제 때의 해골’

▲ 평화회의 취재기자단과 특사들이 회견한 내용을 실은 <평화회의보>.(이준열사기념관 전시)

평화회의를 주관하는 측에서 발행한 <평화회의보> 7월 5일자에 한국의 세 대표의 사진과 함께 한 익명의 신문기자(영국인 ‘윌리엄 스테드’인 듯함. 이위종은 그가 주관하는 국제기자단에 참석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함)가 우리 대표들을 일종의 기자회견 형식의 글이 실렸다.
‘축제 때의 해골, 대한제국 이위종과의 회견’이란 제목의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잔칫상에 해골 하나를 놓아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 목적은 회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허무를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영원불멸한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헤이그 회담은 이같은 비망록을 소유하는 특권을 갖게 된다. 오늘 바로 이 자리, 즉 드리데르잘의 닫혀있는 문 앞에 앉아있는 대한제국의 이위종은 몸소 그 옛날 이집트 해골의 현대판이 되고 있음을 스스로 절감하고 있다. 이위종은 학식이 깊고 수개국어를 말하며, 철저하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늙은 멤피스의 흉측스러운 몰골이 회식자들의 폐부에 냉혹한 공포를 던져주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위종은 열정적인 신념으로부터 관대한 착각으로 빠져들어 기정사실화된 것을 비웃고 있다. 그는 운명이 조약에 서명한 것을 조롱하는 의문부호이다. 특히 그는 평화회의 문턱에서 방황하면서 빈정대는 메피스토펠레스, 즉 부정의 영혼인 것이다.

기자가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십니까?” 하고 묻자 이위종은 “나는 흔히 제단이 헤이그에 있다고 말하는,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혹시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위종이 기자에게 물었다.

이위종:도대체 이 방 안에서 대표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자:그들은 전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조약들을 체결할 것입니다.
이위종:(조소어린 웃음과 함께)조약들이요? 조약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난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대한제국이 이 회의에서 제외되었습니까? 조약들이란 바로 위반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자:하지만 보십시요. 1905년 11월 17일 조약에 의해.....
이위종:(말을 끊으며)여기 이 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까?
기자:각국의 참여를 비준해야 하는 그들 군주들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위종:아,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1905년 조약이란 조약이 아니군요. 그것은 우리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대한제국 외무대신과 체결한 하나의 협약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서명된 서류는 결코 비준된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효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불법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서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이번 회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기자는 일본이 현실적으로 강대국임을 인정해야 되지 않느냐는 투로 말했지만 이위종은 이를 강하게 맞받아쳤다.

이위종: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이란 유령일 뿐이며,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당신들의 기독교란 한낱 위선에 불과합니다.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에 희생돼야 합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의, 권리, 그리고 법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이위종은 기자에게 위선적인 평화회의를 질타하고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말했다. 기자는 다음과 같이 이위종과의 회견 기사를 끝맺음 했다.

“무력이 세계를 지배한다. 세계를 지배해왔다.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온유함은 연약한 것이다. 승리하는 것은 바로 무력이다.”

◇ 한국의 호소

뉴욕에서 발행된 <인디펜던트>지는 1907년 7월 9일자에 이위종의 ‘한국의 호소’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이위종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강도로 표변해 한국을 침탈하고 있는 상황을 낱낱이 고발했다. 다음은 이 글 중 일부이다.

일본 언론인들이 세계 앞에서는 한일간의 조약(소위 을사조역)은 원만하고 우호적으로 체결되었다고 했다.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주머니를 훔치는 위선자인 일본은 백주의 강도보다 더 비열하고 아수적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들은 깜짝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한국인들은 봉기했다. 그리고 일본은 무도하게도 총과 칼로 이를 제압했다. 1905년 11월 7일부터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인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일본은 한국 기관들을 접수하고 곧 그 기관을 통해 전적으로 오로지 일본의 재정적인 이득만 취했다. <중략>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위와 같은 일본의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침략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그들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있다.

이같은 이위종의 호소가 알려지자 재미 한인동포들은 헤이그평화회의에 호소문을 보냈다. 1907년 7월 12일에 접수된 전보는 가음과 같다.

수신:헤이그, 헤이그평화회의 귀중
발신:미국 대표단 한인회 정위강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15 55A

한국의 약함을 이용하여 일본이 한국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는 세계적으로 가장 심각하고도 불행한 일이다. 이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간청하오니 평화회의에 참석하고 계시는 존경하는 대표들께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미국 한인회 회장 정위강

◇러시아와 미국의 냉담한 태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 했다. 러시아에 기대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려는 정책을 펴던 민비를 시해하기에 이르렀다.(1895년)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에 굴복하는 일본을 본 고종황제는 러시아와의 우호정책을 지속했다. 1896년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까지 했다.(아관파천) 이처럼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최대 우방이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경유해 헤이그로 떠나는 이준에게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2세에게 주는 친서를 써보내며 헤이그평화회의에서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태도는 냉담했다. 다음은 러시아 외무부와 주프랑스 러시아 대사이자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사이에 오간 전문이다.

만약 한국에서 대표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여 귀하(넬리도프)를 만나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도록 하라.
<러시아 외무부 자료보관소>

한국에서 왕자라고 칭하는 이위종이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기들이 초청되지 않은 것과 또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항의서를 모든 나라 대표에게 전달했으며, 회의 주최국인 네덜란드의 초청장을 지참한 대표들만 본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고 그들에게 간접적으로 일러주었다.
<넬리도프가 본국 정부에 친 전문. 러시아 외무부 자료보관소>

한편 당시 헤이그에서 발간되던 일간지 <Het Vaderland> 7월 30일자에는 “헤이그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 주프랑스 대사는 한국이 초청받지 못했기 대문에 대회에 참석할 수 없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고, 미국 대표 초트(Choate)도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항상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헤이그평화회의에서는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시 미국은 이미 을사늑약의 모태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특사들은 ‘힘의 논리’만이 통용되는 국제 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보았다.

◇돌아오지 않는 특사들

1907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일간지 <Het Vaderland>는 이준 열사의 죽음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이준 의 시신이 장지로 옮겨지던 16일 이상설 대표는 “슬프다, 슬프다”를 반복했다고 17일자 <평화회의보>는 보도했다.
이준열사기념관에서 헤이그 시청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이준 열사의 사망증명서에도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러 신문들이 그의 사망 사실을 보도했지만 정확한 사인은 발표되지 않았다. 당시 헤이그의 주네덜란드 일본대사가 도쿄로 보낸 전보에는 “한국에서 온 이씨가 안면 수술 후 단독(丹毒)으로 사망했다”고 하면서 “자살이라는 풍설도 있다”고 보고했다.
이준열사기념관이 네덜란드의 한 백과사전에서 확인한 이준에 대한 항목에서도 그의 사인을 ‘자결’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애국자 이준(1859~1907)은 1905년 이래 보호정책을 강요하는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에 의해 제2차헤이그평화회의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일본을 불쾌하지 않게 하려 했으므로 이준은 평화회의 참석이 거부되었고 그는 자결했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에 묻혔다가 1963년 한국 서울로 돌아갔다.<드 흐로트 윈크레르 백과사전>

 

▲ 이준 열사가 순국한 호텔 방

그의 죽음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가설들이 있지만 아직도 그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 하여 세 특사를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禪位)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퇴위시켰으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했다.
이후 이상설은 1908년 미국으로 가서 각지의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승희·김학만·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부근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 지난 7월 28일 충남도의 오랜 우호협력 도시인 러시아 레닌그라드주를 방문한 안희정 충남 도지사가 이범진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충남도청 제공>

이위종은 이미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에 묻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블라지보스토크와 뻬쩨르부르그에 가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1911년 1월 13일, 부친인 이범진이 망국의 슬픔을 못이겨 자결하자 이위종은 그 해 러시아 제국 소속 블라지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이후 장교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16년에 동부유럽전선에 발령받은 후, 1917년에 가족에게 전사통지서가 배달되었지만, 사망 지점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에 발견되어 러시아 정부에 의해 공개된 이위종의 자서전에서는 그가 1924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 자료: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 전시 자료.
<아! 이준 열사>(이기항·송창주 공저. 2007년 공옥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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