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럿’의 구현제
가을-‘여럿’의 구현제
  • 뉴스서천
  • 승인 2003.09.26 00:00
  • 호수 1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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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습니다.
9월. 말만 들어도 시원한 기분이 솟아오릅니다. 햇곡식으로 빚은 음식을 먹고 추석을 보낸 지금, 가을의 한 복판에 들어선 느낌이 완연하지요.
말도 살찌고 오곡백과도 풍성한 가을은 수고의 대가가 얼마나 보람스러운 가를 절실히 알려 줍니다. 가을이 아무리 가슴 뿌듯한 포만의 계절이라고 하더라도 저만 홀로 뽐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계절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이 타는 여름의 가슴졸임이 없이 가을의 수확은 불가능하구요, 봄의 씨 뿌림 없이 어찌 여름의 땀 흘림이 가능하겠습니까. 겨울도 그렇습니다. 꽁꽁 언 겨울의 동토는 불모 그 자체 같지만 실제론 자신 안에 이미 봄을 잉태하고 있기에 석녀(石女)의 계절로만 치부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을이 왔다 해서 무조건 거두려고 낫을 댈 게 아니라 가을의 가을됨을 곱씹어 가을 안에 있는 가을 사람의 면모를 갖추는 일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가을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때 우리는 혼자이기를 고집하지 않을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여럿과의 어울림 삶에서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혼자이기를 선언합니다. 그렇게 했다고 하여 혼자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살펴보면 어쩔 수 없이 여럿 속의 자기일 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은 혼자임을 뜻하는 말이기는 하나 여럿을 배제한 로빈슨 크루소적 독처(獨處)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혼자는 없습니다. 절해 고도에서 수도하는 구도자라 할지라도 여러 삶들의 연결고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친척 친지 사이에서 외톨이가 됐다 해서 그들과의 고리를 벗어버린 건 아닙니다.
여럿의 삶(共同體的 生)은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명제임을 깨닫고 힘써 그 삶을 그 삶답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어서 여럿이 된 것도 있지만 우리의 삶은 그 존재상 나 이전에 벌써 여럿으로 된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인간(人間)이라는 글자 뜻이 그런 것처럼 여럿 속의 나임을 바로 알아 여럿 됨을 잘 이뤄가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삶은 그에게 속한 여럿 가운데 혼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럿 된 것은 우리의 의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여럿 되는 의도를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어 이루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그리스도의 여럿 됨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생각만으로 될 법합니까? 안됩니다. 이 일이 애초 우리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서 안됩니다. 실상 파고들면 안 그렇지만 언뜻 보기에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것 같은 이 일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 것이 되는 데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여럿의 성질을 띠고 사역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분 안에 있는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여럿 속의 혼자, 여럿과 함께 하는 혼자, 여럿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혼잡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잘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가을이 제 홀로 가을이 아니듯이 우리도 나 홀로 있는 게 아닙니다.

<구영욱/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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