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설 / 혁명가로서의 월남 선생을 기리자
■ 사설 / 혁명가로서의 월남 선생을 기리자
  • 뉴스서천
  • 승인 2018.04.04 18:04
  • 호수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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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한 이후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 및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난세에 서천이 낳은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이 땅의 민중이 주체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 근대화를 수립하려는 데 신명을 다바쳤다.

그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실현코자 했다.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애국적 지식인들의 활동은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 : 의회설립법)를 공포토록 하는 데 성공했으나 고종은 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의회 설립령을 취소했다.

개벽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생은 신민회를 결성해 민주공화정을 추구했다. 이러한 신민회의 활동은 훗날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국체를 민주공화정으로 하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에서도 월남 선생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가 하나로 결집 시키는 데 노력을 쏟아 마침내 결실을 얻었다.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며 이 땅에도 영향을 미쳐 1927년 좌우 합작의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월남 선생의 역할이 컸다. 이처럼 월남 선생의 일생은 사회 변혁 운동을 위한 바친 혁명가의 삶이었다.

지난 달 29일은 월남 선생의 91주기 추모일이었다. 서울과 서천에서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뉴스서천은 서울에서 열린 추모식을 취재하고 월남선생의 묘역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월남 선생이 추구했던 정신을 기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추모회장에서 보수야당 대표의 화환은 눈에 띄었으나 어느 진보 단체에서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선일보 창간 초기에 월남 선생이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1930년대에 사주가 바뀐 이후 변질된 이 신문사에서 월남 선생 선양사업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승만이 젊었을 때 스승으로 모신 월남 선생을 훗날 독재자가 되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월남 선생 묘소 경기도 양주시 천묘로 여겨진다. 그의 지시로 천묘했다고 한다.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를 찾았을 때 이러한 흔적들이 그대로 배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부터라도 월남 선생의 진면목을 찾아내고 선양사업을 새로이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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