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신웅순
■ 모시장터 / 신웅순
  • 뉴스서천
  • 승인 2018.05.24 09:07
  • 호수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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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에도 시인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신웅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무슨 시간이었는지는 모르나 선생님은 칠판에다 무엇인가 설명하시려는 듯 대나무를 그린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대나무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온 몸이 감전된 듯 큰 충격을 받았다. 어린 나이이지만 어쩌면 저렇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육십년 세월이 흘렀건만 그 때 그 대나무 그림은 지금도 내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6.25 한국 전쟁 이듬해에 태어났다. 늘 불안한 어머니 뱃 속에 내가 있었으니 뱃 속의 나인들 편할 일이 있었겠는가. 성격이 좀 급하고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것이 혹여 그 탓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 때 태교하지 못했던 탓이었을까. 누구나 마찬가지겠으나 그래서 난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때 공부했던 초등 교사는 초가집이었다. 다행히 천막이 아닌 천장이 있어 눈과 비는 피할 수 있었다. 수업에는 큰 지장이 없었으니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말랑말랑한 맨땅에 가마니를 깔고 거기에 앉아 우리는 종알종알 병아리처럼 수업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이었다.

이후 매주 토요일, 그림을 그리고 싶어 특활 시간에 미술반에 들어갔다. 특활 선생님은 학생들 보고 코스모스꽃을 꺾어 오라했다. 선생님은 코스모스를 한주먹 듬뿍 화병에 꽂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그렸다. 한참이 지났을까. 선생님은 내 옆으로 오시더니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뭐 잘 못한 것이 있었나?”

내심 불안했다. 품평회 시간이었다. 내 그림을 칠판에 붙여놓으시더니 제일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해주셨다. 우리 학교에서 미술에 소질이 있는,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모인 미술부인데 그 중 내 그림이 뽑혔으니 선생님이 보시기에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은 일정하게 활짝 핀 만발한 꽃들만 그렸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활짝 핀 꽃은 물론 봉오리도 그렸고 숙여진 꽃도 그렸고 옆의 꽃모습도 그렸다. 색깔도 진하게 혹은 옅게도 그렸다. 나는 그냥 내 눈에 비친 대로 보이는 대로 그린 것뿐이었는데 선생님은 실감나게 그렸다고 칭찬해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나보고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후 몇 번을 혼자 연습했던 것 같다.

대회 날이었다. 주제는 가을 소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크레용을 준비했는데 물감으로 그리라는 것이었다. 한번도 물감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나는 어린 나이에 얼마나 떨리고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 때의 애타는 심정을 지금도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선생님은 물감을 급히 구해 내게 건네주었다. 한번도 물감으로 그려보지 못한 나보고 어떻게 그리라는 것인가. 파렛트에 물감을 풀고 붓으로 개어 그림을 그리는데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학교의 명예를 걸머졌으니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물감을 사용해 그린 것은 내 인생에서 그 때가 처음이었다.

높은 산을 그렸다. 능선에다 산길을 그리고 아이들이 줄을 지어 산을 오르는 모습을 그렸다. 잘 그릴 리가 없었다. 물론 상도 받지 못했다. 물감으로 몇 번을 그려봤더라면 그렇게까지 엉망으로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창피스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후로 몇 번 그림 대회에 나갔었는데 뛰어나지 않았지만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은 몇 번 상을 탄 적이 있었다. 대회에 가려면 매일 열심히 그려야 하는데 크레용 값도 만만치 않은데다 누가 특별히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어 그러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교과서 외에 한 권의 동화책도 한 편의 시집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 학교에는 도서관도 없었고 책도 없었다. 면내에 만화가게는 있었지만 만화를 보다 선생님한테 걸리면 종아리를 맞았다. 선생님이 보지 말라 해서 나는 한권의 만화책도 읽지 않았다.

글짓기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다. 4학년 때였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숨을 쉬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몇날 며칠을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던 같다. 숙제였던가 그래서 그것을 글로 써본 기억이, 나와는 상관없이 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나비를 등장시켜 글을 쓴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내가 뭘 알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후로 한 번도 글도 시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어린 날의 희미한 기억만 있을 뿐 글과는 한참 인연이 멀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화가가 되고 싶었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런데 나는 가난한 시인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엊저녁 꿈을 꿈었다. 내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새가 우는 참으로 아름다운 숲이었다.

바로 저것이다.”

나는 꿈 속에서 외쳤다. 저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서는 꿈에서 깨었다. 숲의 재잘재잘 새 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멍멍한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나는 시도 하고 음악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서예도 한다. 사람들은 나보고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한다.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다 예술 하나로 묶어 보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지금도 속상하다.

사토 잇사이의 잠언 어록 언지록첫 장에 이런 말이 있다.

운명은 모두 전부터 정해져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어찌 생각해보면 얼토당토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가만히 묵상해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나는 어렸을 적에 한 번도 시인을 꿈꾸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시인이 되었다. 마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칠판에 그렸던 대나무 그림 때문에 나는 지금도 그림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곧고 텅 빈 대나무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일까. 살아있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살 맛이 나는 것은 이런 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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