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골 촬영 현장에서 3개월간 아버지와 함께 했다”
“피아골 촬영 현장에서 3개월간 아버지와 함께 했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8.06.19 20:22
  • 호수 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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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역사영화제로 고향 찾은 이준재씨
피아골 상영이 끝난 후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준재씨
피아골 상영이 끝난 후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준재씨

지난 17일 금강역사문화제 마지막 날 상연 작품은 서천 출신의 영화인들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빨치산 영하 ‘피아골’이었다.
이 영화는 실화에 가깝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 남한에 갇힌 빨치산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이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저항하던 아가리부대도 이 무렵 최후를 맞았다.
토벌을 담당했던 한 경찰이 아가리부대 대원이 남긴 일기와 관련 자료를 당시 전주에서 활동하던 이강천 감독에게 전해주었다. 이 감독은 이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어 1955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현실에서 빨치산이란 ‘악의 무리’로 묘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 감독이 만든 영화 속에서는 그들 역시 인간이었다. 이들의 고뇌와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가 ‘피아골’이다.

영화가 끝난 후 영화평론가와 역사가가 진행한 토크쇼가 있었다. 분명히 반공영화이지만 이젠 역사가 돼버린 당시 상황에서 이 감독의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탐색해보는 자리였다.

기벌포영화관 벽면에 전시된 이강천 감독 앞에서 아들 이재준씨가 기념촬영하고 있다.
기벌포영화관 벽면에 전시된 이강천 감독 앞에 선 아들 이재준씨

이날 초대된 이강천 감독의 장남 이준재씨가 영화와 관련해 그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를 이곳 서천에서 관람을 하니 새로운 감회가 듭니다. 이 영화 촬영 당시 전주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건강이 안좋아 수양 겸해서 아버지를 따라 촬영 현장에서 3개월쯤 지냈습니다. 추운 겨울에 계곡을 건너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배우들이 선뜻 나서지 않자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계곡을 건너며 배우들을 독려했습니다. ‘영화감독이란 이런 리더십이 있어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강천 감독은 본래 화가였다 한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림이다 보니 영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준재씨는 가난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지금도 영화계가 어렵지만 당시에는 더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섭섭하셨겠지만 영화는 보기도 싫었습니다.”

그는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이 그의 동창이다. 김승옥은 21세 되던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많은 단편들을 내놓으며 예술적 성취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아버지로부터 “승옥이도 저렇게 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는 책망도 들었다 한다. 그는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아버지의 예술가로서의 치열한 삶을 보고 겪었다.

“한번은 국회부의장으로부터 맞고 왔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부독재는 영화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고 한다. 이강천 감독의 예술혼도 위축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끝까지 놓지 않고 영화 제작을 위해 자금을 마련할 궁리를 했었다고 전했다.

이강천 감독 생가 터 부근에 있는 샘
이강천 감독 생가 터 부근에 있는 샘

이준재씨는 9살 때까지 서천에서 살았다 한다.
“어제 석촌리에 살고 있는 친척들도 만나보았습니다.”

한국영화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큰 업적을 남긴 영화감독이 태어나 자란 생가지에는 빗돌 하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물만 예전처럼 물을 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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