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평화가 상식인 세상을 상상해보니
■ 모시장터-평화가 상식인 세상을 상상해보니
  • 칼럼위원 정해용
  • 승인 2018.06.27 18:07
  • 호수 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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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용 칼럼위원
정해용 칼럼위원

100년이란 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은 이 땅에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19년 조선인의 대한독립선언이 공표되기 한 해 전이었다. 유럽에서는 5년 동안 끌어오던 세계 1차 대전이 끝나 독일제국이 멸망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농민혁명의 결실로서 공산당, 사회주의 등이 세계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 후 100년 동안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항공기와 기선, 자동차, 전기, 통신 등의 발달로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100년은 참 긴 시간이다. 

서기 1096년. 유럽에서는 이른바 ‘십자군전쟁’이라고 부르는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세력다툼 성격을 지닌 이 전쟁은 공식적으로 1291년까지 무려 200년이나 지속되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시작되어 손주의 손주의 손주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전쟁이었다. 대대손손 마치 일생의 숙명처럼 물려주는 전쟁이었던 셈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막내삼촌의 입영열차를 전송하면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아들이 장성할 때쯤이면 우리나라도 통일이 되어 군대 갈 일이 없게 되겠지.’ 그런데 이후 50년 넘게 흘렀지만 어머니의 꿈은 그저 꿈에 그쳤다. 큰아들 둘째아들 셋째아들까지 내리 의무복무를 마쳤고, 그 아들들의 아들들까지 군복무를 마쳤으며, 이 땅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병역의무를 지고 거의 70년째 전선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 

12~13세기의 십자군전쟁을 잠시 돌아본다. 처음에는 유럽의 기독교도들의 이슬람에 점거된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자는 전쟁이었지만, 200년이나 전쟁을 지속하는 동안 전쟁의 성격은 점점 애매모호해졌다. 교황의 호소에 따라 일곱 차례나 유렵 연합군이 결성되어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성지 탈환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전투는 제1차 원정에 그쳤다. 3차 원정에서는 출동했던 연합국의 왕들끼리 불화가 일어나 스스로 해산해버렸고, 4차-5차 원정 때는 베네치아 상인들로부터 이집트에 밀린 용선료 외상값을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성지탈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을 공격하여 한낱 비즈니스로 전락했다.

순진한 농민 의용군이 출동하여 전멸 당하는가 하면, 열성적인 신심으로 들떠 출동한 소년소녀 십자군도 있었다. 3만 명이나 되는 소년소녀들이 배를 타고 출발했지만, 일부는 파선당해 죽고, 나머지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닿자마자 그곳 상인들에게 속아 노예로 팔려갔다. 그나마 이슬람 왕이 7백명의 어린이들을 구출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이 전부다. 오래 끈 전쟁은 철저히 권력자들과 상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되었을 뿐이다. 

200년 십자군전쟁이 끝난 것은 지혜로운 성인들의 각성에서 시작되었다. 아시시의 성인 프란시스코가 ‘전쟁의 진정한 목적은 살인과 점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여야 한다’고 설파했다. 예루살렘의 평화는 이슬람과 기독교간 전쟁에 아니라 협상과 타협에 의해 실현되었다. 
지금도 중동지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여러 전쟁들이 벌어지지만, 그 전쟁상태가 철저히 세계 무기상인과 석유상인, 그리고 세계 강대국 지도자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전쟁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70여년을 끌어온 한반도의 분쟁상태는 누구에게 이용되었나. 그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미일중소 등의 이해관계, 각국 지도자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분단이 유지돼 왔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안보’라는 명분이 보수적 정파에 의해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정작 전쟁다운 전쟁은 6.25가 벌어진 뒤 1년, 소강상태까지 합산해도 3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한국인의 대다수에게 남북 분단과 대결은 우리 세대의 전쟁이 아니라 단지 물려받은 전쟁일 뿐이다. 대결이 없는 한반도를 우리는 겪어본 적이 없다. 이제 전쟁상태가 종식된다니. 어색하고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누구를 경계하고 누구를 적으로 삼아야 하나. 

전쟁을 끝내고 총칼을 녹여 보습을 만든다는 건 일종의 혁명이다. 더 이상 싸워야 할 적이 없는 상태. 더 이상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는 생소하다. 분단시대에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비용, 시간, 노력들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이제 그 비용들을 어떻게 평화시대에 맞게 돌려 쓸 것인가. 분단비용을 평화비용으로 돌려쓰는 데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선 평화 상태는 전쟁상태에 비해 훨씬 덜 위험하고 덜 고통스럽다는 사실부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시인 peac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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