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환영의 그림책 이야기 /제11화 -‘사람 죽고 통일’이 무슨 소용 있을까
■ 김환영의 그림책 이야기 /제11화 -‘사람 죽고 통일’이 무슨 소용 있을까
  • 김환영 시민기자
  • 승인 2018.07.18 21:21
  • 호수 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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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맨들》(신혜은 글, 조은영 그림/시공주니어2015)

지난 213일자에 10안방에들 모이면 방 안에서는 새옷 내음새가 나고를 연재하고 쉬고 있던 김환영의 그림책 이야기를 다시 연재합니다.

 

더는 자라지 않는 어린 딸이

그리운 아빠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망부가

▲표지 그림
▲표지 그림

명절날 큰댁에 가면 고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는 젯상 한 귀퉁이에 소반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그 작은 소반에도 음식이 놓였지만, 지방은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주관하던 큰아버지께 저 상은 무어냐고 여쭌 적이 있습니다. 얼핏 둘레를 살피더니 목소리 낮추어 큰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느이 넷째아버지여.” 형님들은 의아해 했지만, 나는 아주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산에서 나무를 해 지게에 지고 내려올 때면 지게작대기를 흙바닥에 두드리며 언제나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던 한 가난한 청년을 떠올렸습니다.

50년대의 마지막 생인 나는 어릴 때 호랭이나 도깨비가 나오는 옛이야기가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를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 집안도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고,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잠자리에서 어머니는 내게 들려 주셨습니다. 아마도 내가 아직 말귀를 못 알아먹는 어린애였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알 수 없는 캄캄하고 아득한 상상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면 까마득한 감상에 빠지곤 합니다. 마치 내가 당시를 살았던 것처럼 아득하고 먹먹해집니다. 나 또한 옛이야기를 좋아하고 관심도 많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호랑이 담배 먹는 그림은 못 그릴 것 같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구렁이나 여우나 도깨비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현실세계가 똬리를 틀고 도무지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 조개맨들(신혜은 글, 조은영 그림/시공주니어 2015)이란 그림책 표지를 봤을 때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어요. 바닷가 조개를 조개맨으로 의인화한 시답지 않은 그림책으로 여겼습니다. 모니터 화면으로 본 표지 그림은 엉성하고 무성의해 보였어요. 뭉개진 주인공 얼굴도 화면에 어정쩡 내려놓은 디자인도 도무지 마땅치 않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리뷰를 읽게 되었고, 나는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빌렸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림책에서 가능하지 않은 그림이란 없습니다. 그림책 그림은 만화나 개념적 표현만으로도, 서툰 붓질이나 입체물로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림이 주는 천연의 매력이나 장악력을 느끼지 못하면, 거짓 몸짓을 하거나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하면 저는 곧바로 돌아서게 됩니다. 못된 버릇인데, 그게 잘 고쳐지질 않아요.

나는 그림책을 볼 때 우선 그림만 봅니다. 그런 다음 글과 함께 읽으면 그림들은 신기하게 처음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그림은 새롭게 해석되고 전과는 다른 생명력을 얻는 것입니다. 유화물감을 덕지덕지 발라도 그림책 그림은 낱장의 회화와는 다르지요. 그림책 그림은 서사-표면에 드러나든 아니든, 글이 있든 그렇지 않든- 속에서 읽히고 재해석되는 이야기 그림인 겁니다.

▲도판1
▲도판1

첫 장을 열자마자 그림의 회화적 리얼리티가 마음에 훅, 끼쳤습니다. 아이들 그림처럼 우연하고 천진해 보이지만, 잘 설계된 그림은 힘이 넘칩니다. 이 그림은 손목이 아니라, 드물게도 온몸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인사를 하거나 걷거나 안길 때, 그 소소한 동작에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습니다. 발상은 자주 만화처럼 보이지만, 그 표현에서는 표현주의 회화에 가깝게 다가옵니다. 찍고, 붙이고, 긁고, 흘리고, 갈필을 활용한 붓질은 화면에 차고 넘쳐 활달합니다.

재현이 아니라 실감을 목표로 둔 화가의 그림은, 원화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쪽마다 들쭉날쭉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장마다 펼쳐놓은 그림들은 비례도 다르고 크기감도 다르게 다가옵니다. 일본 그림책 작가 다시마 세이조의 원화가 그랬습니다.

▲도판2
▲도판2

나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이 같은 어른이 좋습니다. ‘어른 같은 어른은 관공서처럼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요. 아이를 품고 사는 어른들은 더러 어리석어 보이지만, 이야기도 많고 유머도 풍부합니다. 위에서 굽어보는 눈으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아이의 눈빛을 이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발견되는 어린아이의 시선이 마음과 눈길을 붙잡습니다. 그림과 글이 아이다운 시선을 유지하지 못했다면 이 책은 지금보다 훨씬 엄숙하고 딱딱해졌을 거예요. 더구나 유머는 이즈음 일상의 코드입니다. 이는 길고 지루하고 팍팍한 일상에 물기를 보태어 좀 더 친근하고 말랑말랑하게 해주지요. 전쟁과 포화와 이별 속에서도 유머는 힘을 잃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실제 지명을 통해 구체적인 무대를 밝히고, 어린 딸의 기억에 지문처럼 남아버린 이야기의 조각들을 도막도막 이어갑니다. 이러한 기술방식은 단일한 기승전결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확보할 수 있어 자주 애용됩니다. 그림 또한 앞장과 뒷장의 정치한 계산에서 놓여나 분방한 표현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조개맨들의 이러한 구성 방식을 나는 조금 다르게 읽고 싶어요. 그것은 아버지와 헤어진 어린 영재가 이 세상을 홀로 걸을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애틋한 사랑의 조각들이 캄캄한 어둠 속 가로등 불빛들은 아니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소라참외, 김박가참외, 호박참외라니, 먹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참외 이름들이 정겹고 아릿합니다. 그리고 새 신발밤나무 가지를 다듬어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 섬에는 밤나무가 많기도 했겠지만, 밤나무 가지에 손도끼나 자귀를 내리치면 정확하게 양쪽으로 빠개집니다. 밤나무의 단면은 가시가 없이 편편하고 가벼워 신발로 쓰기에 맞춤했을 겁니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밤나무로 윷을 만들어서 놀지요.

이야기에는 구두를 만드는 유리꼬네 아빠가 드러나고, 이사할 때는 유리꼬의 이름도 호명됩니다. 우리는 유리꼬라는 일본 이름을 통해 일제가 남긴 상처 하나를 유추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귀한 것은, 작가가 이에 대한 섣부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에요. 유리꼬와 유리꼬 아빠는 주인공 영재의 동무이자 따듯한 이웃인 것입니다. 동화작가 권정생은 도쿄 시부야에서 일본의 가난한 아이들과 똑같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글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잔류해 살았던 가난한 일본인 가족의 거취는 주류 역사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기록입니다. 조개맨들또한 숨겨진 한 편의 민중서사인 것이지요.

아빠가 머리에 인 보퉁이 이삿짐에는 아빠가 지은 집이 고스란히 들어앉아 있습니다. 영재가 인 피난 짐에는 바로 그 아빠와 아빠가 지은 집과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지요. 주인공 영재와 아빠의 긴밀한 유대감은 그림책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도판3
▲도판3

아빠가 손수 지은 집. 나는 아빠가 일하는 방 앞에서 논다. 왜냐하면 아빠가 보이니까. 아빠가 나 보고 웃으니까란 진술이 참 따스합니다. 글은 작정하고 엄마가 아닌, 아빠와 딸의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세워놓고 있습니다. 전쟁통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생애에 걸쳐 딸의 가슴 속에서 반복되고 재생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이 여운을 남기는 까닭은 바로 영재의 자기서사가 품고 있는 애절함 때문입니다.

지문에 구체적으로 번지수까지 밝혀놓은 것으로는 부족했을까요? 뒤에 실은 흑백사진은 오히려 그 실제성 때문에 이 그림책이 수행하고 있는 상상력을 한정하는 느낌입니다. 앞뒤의 면지가 뒤바뀌었다면 어땠을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다름 아닌 바다로 둘러싸인 섬 땅인 것이고, 여전히 성장이 멈춘 채 조개맨들에 홀로 서 있는 어린 딸 영재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는지요.

교동면 대룡리173번지흔다리 서쪽에 있는 조개맨들을 지도로 검색해 확대해 봅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차편으로 다닐 수 있지만, 당시에는 배를 저어 가야하는 섬이었겠지요. 샛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황해도 땅, 그러니까 북한입니다. 숨결처럼 부드러운 개펄과 파르스름한 뱃길을 따라가며 가공의 금이 그어져있습니다. 물리적 철조망이자 남과 북의 이성마저 철저하게 망가뜨린 녹슨 쇠붙이입니다.

책을 닫고 다시 표지를 봅니다. 이제 이 그림은 본문의 사연을 품어 전과는 다른 그림으로 읽게 됩니다. 그림책 조개맨들은 더는 자라지 않는 어린 딸이 그리운 아빠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망부가입니다. 거의 매 장마다 칠해진 물빛-세룰리안블루는 교동도란 섬 땅의 운명이자 바다겠지요. 그 파랑 물빛이 하나의 기조를 유지하며 그림책 전체를 일관성 있게 이끕니다. 독자에게 그 파랑은, 굽이굽이 잔상으로 남아 오래 기억될지도 모릅니다.

▲도판4
▲도판4

식민지와 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이 땅 어디에도 눈물 아닌 곳이 없습니다. 너무도 늦었지만, 일촉즉발 하던 한반도 상공에 그 어느 때보다 평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어린 딸 영재는 이제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요? 어느 노랫말처럼, “사람 죽고 통일이 무슨 소용있을까요? 영재가 그렸을 법한 교동 마을 풍경 옆으로, 책은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금도 조개맨들에 서면

아빠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영재야-

아빠-

<김환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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