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월남 선생 탄신일을 맞으며
사설 월남 선생 탄신일을 맞으며
  • 편집국
  • 승인 2018.10.25 10:50
  • 호수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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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10월 26일에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난 월남 이상재 선생은 쓰러져가는 국운을 온몸으로 부여안고 몸부림쳤으며 국권을 잃고 나서도 희망을 말하며 청소년들에게 기개를 불어넣었다. 1927년 3월 29일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신간회 회장을 맡아 우리 독립운동 진영간의 좌우합작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그에 대해 흔히 애국적 계몽 지식인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살아온 길은 끝없는 혁명의 길이었다. 독립협회에 가담해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그가 추구했던 것은 군주정치를 끝내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민영환의 개혁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한 데 힘입어 입헌군주제 수립은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만민공동회의 주도세력은 신정부와의 협의하에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뒤 의회 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개혁파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1월 5일 한국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 신관제(中樞院新官制 : 의회설립법)를 공포했다.

그러나 개혁파 정부와 연합하면 영원히 정권에서 배제되는 것이라고 판단한 친러 수구파는 고종에게 모략 보고를 함으로써 고종으로 하여금 의회 설립령을 취소하게 만들었다. 우리 근세사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1907년 결성된 신민회의 좌장격을 맡으며 민주공화정을 추구했다. 이는 3.1운동 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실현돼 이의 법통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고 일제 몰래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파견하는 일을 성사시켰으며 이로 인해 그는 일제에 피체되기도 했다.
또한 나라의 상징인 고종을 망명시켜 독립운동을 이어가자는 뜻에서 이 일을 추진해 상해에 행궁까지 마련했지만 이를 눈치챈 일제의 고종 독살로 실패했다. 이는 뒤이어 고종 인산날 만세운동으로 번졌다.

민족의 영원한 스승 월남 선생의 탄신일을 맞아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한산 종지리 생가지 일원에서 월남 선생의 탄생을 기리는 ‘제7회 월남 이상재 선생 문화제’를 연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서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오케스트라 공연과 청소년 골든밸, 백일장대회, 그리고 고등학생들의 연극공연도 이어진다고 한다. 청소년의 미래의 희망이라며 청소년 교육에 정성을 바쳤던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많은 주민들이 이날 행사에 참여해 청소년들을 격려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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