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세 여인
■ 모시장터-세 여인
  • 칼럼위원 석야 신웅순
  • 승인 2019.03.27 15:56
  • 호수 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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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들은 나보고 맨날 사랑의 시 나부랭이나 쓰느냐고 한다. 거창한 것들을 써야 시인인 것인가. 무엇을 써야 시인답게 쓰는 것인가. 세상을 살면서 사랑없이 예까지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80년도 30대의 나는 정치와 환경, 역사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혈기만 있었을 뿐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나 버겁고 무거운 화두였다.   

무슨 한이 있었길래
산자락을 싹뚝 잘라

천형의 헤진 하늘
기중기로 들어올려

간음을 당한 한 시대
수술대에 뉘어놓나
          - 「한산초·32」

  7, 80년대 산업화 시대에 썼던 내 생태시의 하나이다. 무거운 시대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운 때였다. 갈수록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나의 시는 깊은 수렁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시에서 시조로 변해간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내 머리는 용량이 적어 무겁고 복잡한 많은 것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들어 만난 화두가 세 여인에 대한 빚이었다. 
  내게 사랑을 주고 떠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와 내게 사랑을 가르쳐 주고 떠난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연인과 내 곁에서 사랑을 한없이 주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내였다. 이 세 여인은 빚을 갚아야할 이유였고 내 삶의 존재 이유였다. 
  내가 초등학교 선생을 한 것은 순전히 부모님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5년 동안 빚을 다 갚고 나선 미련없이 선생을 그만두었다. 그 때 나이 29세였다. 그것으로 빚은 다 갚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랑을 가르쳐준 연인에 대한 빚이 세월과 함께 앙금진 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것은 선생해서, 아르바이트해서, 저축해서 갚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벌써 20년째이다. 이제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니 한 여인에 대해 쓴 기간만도 평균 7년이었다. 그도 고작해야 합쳐 150편이다.  
  내년이면 난 우리 나이로 칠십이 된다. 사랑의 시는 이에서 일단을 마무리 할 생각이다. 이제는 사람들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누가 읽어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치를 잘 몰라 정치에 유척을 들이댈 수 없을 뿐이다.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30대 후반에 토요일은 절에 갔었고 일요일엔 성당에 갔었다. 주변에서 머리가 돈 것이 아니냐고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래 나는 기불교(기독교, 불교)이다.”
  설명하기가 싫어 이렇게 대답했다. 절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다녔던 것인데 주변에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나는 그만 사이비 신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용케도 살아남았다. 이만도 나에겐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시 쓰기를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말로 
서러운 사람은
파도가 없다

참말로
그리운 사람은
바람이 없다

그 많은
파도와 바람이
방파제에서 
부서진 것이다
       - 「내 사랑은 45」

  애틋했던 시절이다. 내게 사랑을 가르쳐준 여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썼던 시이다. 이 시절을 지나고 나선 나는 멀리 떠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지금은 아내의 소중한 사랑을 하나하나 돌에 새기듯 기록하고 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잎새 한 장 뜯어 세월의 강물에 띄워보내면 잎새는 배가 되어 멀리 멀리 떠나갔다. 어디론가 가는 뒷모습조차 내게는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명예가 무슨 필요하며 부귀가 무슨 필요한가. 나는 평생을 평교사, 평교수로 살았다. 요맨큼의 보직이나 정치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몇 년 후면 학자로서의 본분도 일단락 지을 생각이다. 나머지는 사람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진정한 예술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 동안 내 영혼에 많은 때가 묻었다. 미세먼지라도 묻히고 싶지 않다. 묻힐 일도 없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정말 바보처럼 살고 싶다. 
  말없는 저 청산을 보라.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의 얼굴이요 예수를 생각하면 예수의 얼굴이지 않은가. 보이는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달라져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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