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 / 이야기 하나
모시장터 / 이야기 하나
  • 박자양 칼럼위원
  • 승인 2019.04.1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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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증인가. 나이 든 간호사 하나가 심하게 흔들리는 손에 채혈기구가 담긴 철재용기를 들고 다가온다. 혈액검사를 위해 얼마간의 피를 뽑아야 한다는 짧은 설명을 끝내자마자 쉬지 않고 흔들리는 손에 주사기를 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왼팔 안쪽 정맥이 있을만한 위치를 향해 돌진한다. 주사기를 내 왼팔오금에 꽂자마자 그가 묻는다, 피가 없나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지며 주사바늘 끝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쑤셔대더니 아무 거리낌 없이 바늘을 다시 쑥 뽑아버린다. 이런 것이 고문의 일종일까 싶은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는데 바늘 뽑힌 자리에선 뽀옥 솟아오르던 핏방울이 팔뚝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있네요, . 그들에겐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고, 그는 이런 반구 한 마디 말도 없이 여전히 흔들리는 손에 뽑은 주사기를 담은 용기를 집어 들고 달그락거리며 병실을 나가버린다. 나의 뒤틀린 대답에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이 개복수술자리를 움켜쥐고 웃어대느라 여념이 없다. 웃다 터졌는지 수술자리를 응급처치하느라 다른 간호사 둘이 들이닥쳤고, 내 팔의 지혈은 오로지 내 오른손 엄지의 몫이었다.

웃어넘기기도 좀 뭣한, 아니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현실 속 선진유럽의 한 종합병원 병실에서 일어났었다. 물론 5 분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달려와 처치했고, 수전증의 간호사는 의사의 호된 질책을 들으며 여전히 흔들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동상처럼 그 옆에 서있다. 의사의 사과가 이어졌고, 나는 썩은 고깃덩이처럼 검붉게 변색된 왼팔을 뒤로하고 다시 오른팔에서 피를 뽑혀야 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욱신거리는 왼팔을 뒤덮는 차가운 느낌에 잠을 깨고 보니, 그 수전증 간호사가 투명한 무언가를 피멍 든 팔부위에 바르고 있다. 그렇게 그 간호사는 꼭두새벽부터 독특한 방식으로 곤히 잠든 환자를 깨웠다.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아침인사를 건넨다. 그리고는 작고 경쾌한 소리로 미안하단다. 매 순간이 비현실적이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수 십 명의 환자가 입원한 병동을 단 네 명의 간호사가 하루 3교대로 환자를 돌봤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보호자는 밤샘간병은 커녕 문병조차도 오전과 오후 각각 한 시간의 방문시간에만 입실이 허용된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한국의 입원병동에서 일어나는 일은 유럽에서 건너온 외국인에게는 참으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그 때 그랬던 것처럼. 진료방식이 동일한 서양의학에 바탕을 둔, 더욱이 OECD 경제선진국 반열에 명함을 내밀고 있는 국가의 상급의료기관에서 운용되는 시스템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 한 병동에 수 없이 많은 간호사가 이리 저리 분주히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환자대로 의료진은 의료진대로 불만과 고통을 토로한다. 일반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업무영역이니 그 내막은 알 길 없으나, 유사한 방식의 의료활동이 전개되는데 더 많은 인력을 가지고도 질 낮은 의료서비스에 분통터져하는 환자와 지옥 같은 업무환경 탓에 자살하는 의료진이 속출하고 일부는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업무의 과중함이 간호사들에게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업무의 과중함에 앞서 그 직업이 갖는 특성이 배경으로 촉발된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그 스트레스의 암울한 배경을 만들어 내는 원인을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단지, 일방적인 복종과 억압이 양보와 배려를 축출해버린 현실 속에선 타인에 대한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존중이 들어 설 자리를 잃는다. 바쁘게만 돌아치는 현실 속에서 가족은 해체되고 가정교육마저 학교나 사회가 떠안아야 할 형편이다.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고 참교육의 부재가 마치도 모든 것의 원인인 듯 책장 속에서나 방법을 찾아보자는 운동 아닌 운동이 전개되며 어처구니없게도 급작스런 인문학 열풍이 몰아친다. 책이란 것이 그저 읽으란다고 읽히는 대상도 아니고, 눈으로 글을 훑는다 해서 내용이 머릿속으로 알아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니, 독서도 나름의 동기부여가 우선되어야함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지. 더욱이 독서가 해치워야 할 과제 중 하나일 뿐인 아이들에겐 책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고, 이 와중에 개인의 근기를 들어 줄 세우는 기성세대의 못된 악습은 영구적으로 반복될 기세다. 세대 간, 지역 간 특히 묘하게 규정지어진 인간부류 간 안목과 개념의 차이가 우주공간의 별들 사이만큼 벌어져 버린 이 때 어찌해야 이 난국 아닌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인지 망막하지만 그래도 찾아내야한다, 더 이상의 허망한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

입원한 지 열하루 째 되던 날 아침 단정한 모습의 의사가 두 명의 간호사와 함께 회진중이다. 음악 좋아하나요. 타지에서 지내기 쉽지 않지요. 예의 질문 같은 진단이 내려지고 이어 처방을 한다. 좋아하는 음악 많이 듣고 끼니 거르지 말고 가능한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해보세요. 오늘 퇴원하셔도 됩니다. 뒤집어 흔들고 거꾸로 털어 봐도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일주일 여 동안 오만가지 검사를 다 해보고도 원인불명이니 결국은 정신병이었다는 말씀. 강산이 적어도 세 번은 변화고도 남았을 옛 시절의 허접한 이야기 하나는 이렇게 중동무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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