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로 세상 따라잡기 /(4) 일 포스티노 /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
■ 영화로 세상 따라잡기 /(4) 일 포스티노 /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
  • 이창우 작가
  • 승인 2019.05.15 14:36
  • 호수 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망명생활
▲파블로 네루다 역을 맡은 필립 느와레(오른쪽)와 집배원 마리오 역을 맡은 마시모 트로이
▲파블로 네루다 역을 맡은 필립 느와레(오른쪽)와 집배원 마리오 역을 맡은 마시모 트로이

오랫동안 우리는 세계경제에서 경쟁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 임원들은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시 하고 있죠. 내년도 최저임금 논의를 시작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지나온 세월,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과 이윤을 공유하기는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줍니다. 우리는 임금의 불평등과 공정하지 못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경쟁에 대한 일상적인 두려움으로 일부 노동자들은 회사 이익을 위해 자신의 급여와 혜택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종종 회사가 정상화되었을 때 이윤을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했지요. 실상은 지켜지지 않는 허울 좋은 약속이죠.

비대하고 비열한 기업들은 본질적으로 가격뿐 아니라 임금까지도 통제하는 강력한 정치권력과 유착해 그 모든 사실을 외면합니다. 그때 등장하는 말은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또는 국가경쟁력 강화입니다.

기업윤리가 실종된 승자독식의 사회를 멈출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임금의 불평등을 이토록 오랜 시간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조안 B. 시울라는 그의 저서 <일의 발견>에서 기업들이 발견한 기계 안의 유령을 거론했습니다.

그 유령은 바로 세계경제라는 것이죠. 이 유령을 통해 고용주는 경쟁을 내세워 얼마든지 노동자가 희생이 된다는 것에 책임 질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는 말과 기업이 없으면 노동자도 없다는 말로 노동윤리는 우선되고, 기업윤리는 실종되곤 하는 것이죠.

1952년 고국 칠레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당한 세계적 명성을 가진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로 이탈리아의 작고 아름다운 섬에 망명하여 생활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순박한 노동자 일 포스티노(이탈리아어로 집배원)’ 마리오가 망명 생활을 하는 시인에게 우편물을 배달해 주면서 순수한 자아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죠. 네루다의 전용 우편배달부인 마리오는 시의 은유와 공감을 시인과 공유하면서 행복과 우정을 쌓습니다.

네루다가 추방령 해제로 본국에 돌아가자 세상의 아름다움이 함께 떠나간 줄 알았던 마리오는 시적 영감을 통해 듣게 된 마을의 소리들을 녹음기에 담기도 합니다. 파도, 바람, 서글픈 그물, 그리고 시인의 도움으로 결혼하게 된 아내,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 등 자신이 살아온 자기 세계의 소리죠.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집회 때 민중 시인으로 초청받아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를 낭송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연단에 가는 도중 경찰의 폭력에 피를 흘리고 결국 떠밀린 군중에 깔려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무도 노동자 마리오의 죽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화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를 주요 소재로 거론하지만 그와 더불어 자각하는 민중의 모습을 서글프게 보여 주기도 합니다.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약자들의 모습과 진실을 찾아 투쟁하려는 군중을 통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 그로 인해 사회의 변화도 가능하다는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죠.

지식인들이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실천적 영역에서 수행할 역할들, 가진 자들이 사회에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환원할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선거용으로 보여준 지역을 위한 공사로 표를 모으고, 당선되면 모른 척 해 버리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그들에게 우린 늘 속아 넘어갑니다.

한국 사회에서 경영 철학이나 기업가 정신에 대해서는 무심합니다. 돈만 잘 버는 경영자의 모습이 기업윤리를 외면하고 이 사회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던가는 결코 논하지 않습니다. 기업윤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때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어느 한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죠. 오랜 시간 정경유착으로 나타나는 일들을 그저 멀거니 바라본 대한민국은 이제 달라져야만 합니다.

모든 세대들을 넘나들어 자기 각성이 필요하고 사회 문제가 내 문제라는 의식의 전환과 사회적 성찰이 간절합니다. 그 시작은 의식 있는 지식인들과 사회 약자들의 힘이 되어 줄 공동체, 자본에 굴복하지 않는 다양한 분야에서 작은 공동체의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혜택을 받는 기득권층은 사회 약자의 입장에서 보다 공평하고 공정한 질서의 재편을 추구해야 합니다. 존재의 고귀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 자신의 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는 사회, 자기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회는 그들이 이행하여야 할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게 합니다.

내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노동에 기쁨을 느끼며 향유하는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노동은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 주며 노동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미래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득권자들의 집단 이기주의로 대다수의 소외 계층들은 삶에 허덕이게 됩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은 현대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은 자본주의의 꽃이며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조직이기에 기업이 사회를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업 윤리가 실종된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존감을 잃게 만듭니다. 여기,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타살에 아무도 자유로울 수는 없죠.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노동자를 기계 부품쯤으로 여기며 기업가들은 노동자를 착취해 왔습니다.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 인권 유린, 등을 제도 안에서 마구 휘두르는 기업의 횡포를 정부도 공범이 되어 외면해 오고 있었습니다.

노동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이 시대는 희망이 없습니다. 노동은 신성하기에 그 가치로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한다는 진리를 지켜나가야만 합니다.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도 모르며 자라는 세대부터 나아갈 길은 까마득해 보이지만 그래도 함께 걸어가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를 향해 작은 희망을 품는 일이기도 한 낙관주의는 분명 선한 싸움이란 이름의 저항입니다. 미래에 가능한 좋은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능할 내일인 것이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