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4) 염계달이 득음한 음성 가섭사
■ 기획취재 / 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4) 염계달이 득음한 음성 가섭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06.20 09:33
  • 호수 96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고제 명창 염계달, 벽암대사가 중창한 가섭사에서 수련

남한강 따라 사흘 뱃길이면 서울에 닿던 충주에서 활동
▲봉수대가 있었던 가섭산. 지금도 통신시설이 들어서 있다. 원 안이 가섭사.
▲봉수대가 있었던 가섭산. 지금도 통신시설이 들어서 있다. 원 안이 가섭사.
​​​​​​​▲가섭사 삼성각과 해우소
▲가섭사 삼성각과 해우소

19세기에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19세기 전반기를 전기 8명창시대라 하고 19세기 후반기를 후기 8명창시대라고 한다. 전기8명창으로 거론되는 사람은 권삼득·황해천·모흥갑·김성옥·송흥록·염계달·고수관·방만춘·신만엽·김제철 등이며, 김성옥·염계달·고수관·방만춘·김제철 등은 충청도 출신이다. 뉴스서천 취재팀이 지난 15일 염계달 명창이 소리 공부를 하고 활동을 했던 충북 음성과 충주 지역을 돌아보며 염계달 명창의 활동을 추적해보았다.

한강-금강 이어주던 교역의 중심 충주·청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신경림 목계장터부분>

▲한강을 거슬러 온 배가 정박하던 목계나루
▲한강을 거슬러 온 배가 정박하던 목계나루

​​​​​​​압제의 시절 민중과 함께 호흡하던 충주 출신의 가객 신경림의 노래이다. 목계장은 남한강 상류 충주 목계나루에 서던 장이다. 위 시에서 보듯 남한강 따라 사흘 뱃길이면 서울에 닿았다 한다. 박가분 파는 방물장수가 오갔던 것으로 보아 제법 번화한 장이 섰던 것으로 보인다. 분지에 강폭이 넓게 자리잡고 있어 큰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한다.

▲목계나루에 있는 신경림 시비
▲목계나루에 있는 신경림 시비

이곳 목계나루 나룻배엔 금강 하구 서해 바닷가에서 온 소금 짐도 실려 있었다. 강경을 거쳐 부강에서 배를 갈아 미호천을 거슬러 올라 청주 오근장까지 온 물산이 나귀 등에 실려 고갯길을 넘어온 것이다.

<한국전근대교통사>(오동환 지음)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1905년 금강의 각 구역에서 운항 가능한 선박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하류지역은 7~8백톤의 대형선박도 운항 가능했지만, 강경에서 규암까지는 100석 정도의 적재량을 가진 선박이, 그 이상인 규암에서 부강까지는 적재 한도가 50석 이하인 한선만이 운항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 시기에는 부강보다 상류까지 배가 운항할 수 있었다. 18851월부터 약 4년에 걸쳐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몰래 조사했던 일본인 마쓰다 고조의 탐사 기록에 따르면 1880년대 이전에는 물이 많을 때에는 부강보다 훨씬 상류인 옥천과 영동까지도 50석을 실은 배가 올라갈 수 있었으며, 합강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직선거리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오근장(충북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까지도 선박이 왕래할 수 있었다 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청주와 충주는 금강과 남한강의 뱃길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도시였다. 예로부터 인적, 물적 교류는 이 같은 강줄기를 따라 이루어졌으며 두 강줄기를 최단 거리로 잇는 지역에는 상업이 번성했다.

가섭산 정상에 새집처럼 매달린 벽절

1800년대 전반 이른바 전기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염계달은 남한강과 금강의 최대 지류 미호천을 가르는 한남금북정맥 동쪽 남한강 수역의 충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 예술인은 이들에게 충분한 물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부가 축적된 곳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충주는 하상교역도시로서 명창 염계달이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소리꾼은 광대, 또는 재인(才人)으로 불리는 가장 미천한 계급이었다. 아무리 일세를 풍미했던 명창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정확한 생몰연대와 출생지는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성옥과 더불어 중고제 소리의 시조라 불리는 명창 염계달도 마찬가지이다. 1940년에 나온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충남 예산군 덕산면이라는 설도 있다. 파주 염씨 족보에 따르면 충북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는 파주염씨의 집성촌이라 하는데 이곳이 그의 출생지일 가능성도 있다.

박황의 <한국판소리소사>(1975년 신구문화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어려서부터 가요에 천재였으나 가세가 적빈하여 마을 초동들과 나무를 해다가 그것을 팔아 생활을 도왔다. 그의 나이 18세가 되자 부모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고 충북 음성 벽절로 들어갔다. 불목한이 노릇을 하면서 고생으로 10년을 하루같이 소리 공부를 하고 세상에 나오자 그 명성이 일세를 풍미했다. 헌종대왕의 총애를 입어 동지(同知)의 직제를 제수받았고 어전에서 누차 소리를 하는 영광을 한 몸에 지녔다. 염계달은 권삼득의 창법을 많이 모방했다고 한다. 장기로는 장끼타령과 흥보가이고 그의 더늠으로 춘향가 중 십장가가 박만순과 이날치에게 전창(傳唱)되어 전도성의 방창(倣唱)으로 오늘에 전하여졌다.”

▲가섭사 요사에서 본 모습
▲가섭사 요사에서 본 모습

뉴스서천 취재팀이 그가 10년 소리 공부를 했다는 벽절을 찾아 충북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있는 가섭사를 찾았다. 가섭사는 음성군을 미호천 수역과 남한강 달천 수역으로 가르는 한남금북정맥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가섭지맥 가섭산에 있는 절로 음성읍 용산리에서 구불구불 구절양장 도로를 따라 4km쯤 올라가 해발 709m 가섭산 정상 부근에 새집처럼 매달려 있다. 벽절이란 벼랑에 붙어있다 해서 생긴 이름일까. 옛날에는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 ‘올라댕길라-망볼라-불 놓을라’, 봉수대가 있었던 마을 사람들의 고통이었다. 염계달은 이런 곳을 오르내리며 땔감을 마련하고 절 살림을 맡아했을까.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365(공민왕 14)에서 1376(우왕 2) 사이에 나옹(懶翁)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벽암(碧巖)이 중건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응진암(應眞庵)이라 불렀다. 1938년에 불탄 뒤에는 주지 윤원근(尹元根)이 중건하였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섭사 극락보전
▲가섭사 극락보전

이 절을 중건한 벽암대사(1575~1660)1624(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으며 1632(인조 10)에는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옮겨가자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가는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한다.

이 절을 창건한 나옹화상은 고려의 왕사로서 여주 신륵사에서 말년을 지내다 입적했다고 전한다. 여강 강변에 위치한 신륵사에서 음성의 가섭사까지는 뱃길을 이용하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염계달의 득음처 벽절 가섭사

▲1921년의 가섭사 모습
▲1921년의 가섭사 모습

​​​​​​​가섭사에 오르면 음성 읍내가 발 아래 훤히 내려다 보이고 남서쪽으로 멀리 한남금북정맥이 흐르며 밀어올린 보현산 봉우리가 아스라이 보인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를 좌우 양측에서 보좌하던 보살이고 가섭은 석가모니의 제자로 선불교의 기원은 그의 염화미소고사로부터 시작된다.

한편 여강 가에 위치한 신륵사는 고려 말에는 나옹화상이 목은 이색과 함께 불사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사대부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한다. 이를 감안하면 명창 염계달이 여주에서 활동은 했겠지만 수련을 하고 득음을 한 곳은 이곳 가섭사였음이 확실해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절 주지스님에게 물어보았다.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음성군청의 문화재·사찰 담당 공무원과 통화를 했다. 역시 처음 들어본다며 향토사학을 하는 분에게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명창들의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 관광 홍보에 열을 올리는 호남지역과는 대조적이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신경림 목계장터부분>

명창 염계달이 고수와 함께 유장한 중고제 소리를 가슴에 품고 이리저리 떠돌던 남한강 달천에는 중앙고속도로, 평택-제천간고속도로, 364차선도로가 산을 뚫고 강을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내닫고 있었고 울고 넘던 박달재에는 384차선 국도가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