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6)명창 방만춘·고수관 배출한 해미
■ 기획취재/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6)명창 방만춘·고수관 배출한 해미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07.25 19:41
  • 호수 9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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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출신 방만춘·고수관, ‘전기 8명창’ 반열에

방만춘, 12세에 서울로 올라와 성명 드날려

고수관, 시·서에 능한 한학자 신위와 교류
▲판소리 지역도
▲판소리 지역도

판소리연구가인 배연형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장은 판소리는 경기·충청에서 시작돼 금강을 건너 전북·경상과 전남으로 약 200년에 걸쳐 이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기 8명창 시절에는 유파 표시를 아예 안하거나 중고제로 표시했습니다. 당시 명창들이 대부분 경기·충청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작곡했던 소리들 가운데 지금 남아있는 것들을 분석해보면, 소리의 특성이 서울소리쪽에 가깝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의) 후기 8명창 시대로 넘어가면서 전북 명창들이 동편제를 유행시킵니다. 전남에서 서편제가 형성된 건 가장 나중의 일이죠. 전남은 가장 늦게 판소리가 들어갔던 지역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까지 그 형태가 보존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전남의 바닷가 지방, ‘보성소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배 소장이 지난 201410월 서천문화원에서 주최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이를 증명하듯 하한담과 함께 광대의 효시로 불리는 최선달(崔先達·1726~1805)이 홍성군 결성면 출생으로 밝혀졌으며, 19세기 초에 활동했 던 전기 8명창 가운데 모흥갑이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김성옥·염계달·고수관·방만춘·김제철 등은 충청도 출신이다. 이들 가운데 방만춘과 고수관은 서산시 해미면에서 출생했다. 뉴스서천 취재팀이 지난 7일 해미면을 방문했다.

충청병영이 있었던 해미읍성

▲일락사
▲일락사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를 지닌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 1416년 태종이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며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당시 해안 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에 적합한 장소라 판단해 예산 덕산에 있는 충청병영을 이설하기로 하고 1417(대종 17)부터 1421(세종3)에 걸쳐 축성을 완료했다. 오늘날 해미읍성이다.

이후 충청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관인 충청병영이 들어섰으며 병마절도사가 부임해 육군을 총지휘했다. 1652년 청주로 충청병영을 이전할 때까지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 역할을 했다.

한남금북정맥에 있는 칠장산에서 갈라져 나온 금북정맥이 청양을 거쳐 남서쪽으로 흐르다 오서산에서 다시 북상하는데 해미는 금북정맥 가야산(677m)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천수만에 닿는다. 가야산 동쪽은 예산군 덕산면이며 해미와 덕산을 잇는 큰 고개가 한티재이다. 지금은 해미터널로 덕산과 해미가 바로 연결된다. 해미면 남쪽은 홍성군 갈산면이며 갈산면 남쪽에 최선달이 태어난 결성면이 있다.

방만춘, 일락사에서 10년 소리공부

▲일락사 대적광전
▲일락사 대적광전

해미면은 동쪽으로는 큰 산줄기가 남북방향으로 뻗어있고 서쪽에는 천수만에 닿아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가 싹텄을 것으로 생각된다.

명창 방만춘(1825~ ? )은 이런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재능이 있어 11세에 해미 일락사에서 10년 동안 소리 공부를 했고, 또한 황해도 봉산에 있는 어느 절에 들어가 목소리를 다듬어 마침에 득음해 명창이 되었다 한다. 12세에 서울로 올라와 성명을 드날렸다고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나와 있다.

조선창극사에는 그의 득음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두고 있다. 황해도 봉산 어느 절에서 4년간 혹독한 수련을 했는데 주야로 목을 써서 성대가 팽창해 발성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는 절 기둥을 부여안고 목이 터지도록 전력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기력을 다해 소리를 질러놓고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는데 산에서 나무를 하던 절 목공이 이 소리를 들었다. 절이 무너지는 듯한 뇌성벽력 소리가 들려 절로 내려와 보니 사승들은 모두 외출을 하고 방씨 혼자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앉아있었다는 것이다. 본인도 모르게 목이 툭 터져 웅장한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이후 봉산읍의 음률가로 시문에 능한 이와 함께 적벽가와 심청가를 윤색 개작했다 한다. 그는 모흥갑, 송흥록과 동시대인으로 일세를 풍미했는데, 모흥갑은 통성으로 크게 질러대는 고동상성으로, 송흥록은 귀곡성으로 방만춘은 가늘고 약하지만 매우 선명하게 내는 소리인 살세성으로 각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한다.

비로자나불 모신 일락사 대적광전

방만춘이 10년 소리공부를 했다는 일락사는 해미읍에서 4km 정도 동쪽 일락산을 밀어올린 골짜기 황락계곡 최상류 부근에 있다. 황락계곡을 따라 가야산과 일락산 사이로 2km쯤 올라가면 외부로부터 완전 차단된 양지바른 분지에 일락사가 있다. 조선창극사 등 문헌에도 일락산(日落山)’, ‘일락사(日落寺)’로 기록돼 있는데 막상 가보닌 일락사(日樂寺)’라고 쓴 현판이 보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일악산(日岳山)’으로 되어 있다.

일락사는 663년 문무왕 3년에 의현선사가 창건한 고찰로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석가모니불, 오른쪽에 노사나불이 모셔져 있다. 우리 나라 사찰에서 이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각의 명칭이 붙여질 경우에도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게 된다.

비로자나불은 형상이 없는 법신불로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심으로 생각하고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 중생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희구하는 바에 따라 그들의 생각이나 행위 경계에 따라 때를 놓치지 않고 때를 기다리지 않고, 어느 곳, 어느 때나 알맞게 행동하고 설법하며, 여러 가지 상이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소년 방만춘도 소리를 얻기 위해 정진하면서 비로자나불에게 서원을 빌었을 것이다.

신위의 관극시에 등장하는 명창 고수관

▲해미농악단
▲해미농악단

고수관은 순조-헌종-철종 시대에 활동한 명창으로 역시 해미 출신이다. 만년에는 공주에 살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한다.

성음이 미려하고 딴 목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딴청 일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다. 또한 고수관은 문식이 꽤 있어 조선 후기 시서화에 능했던 신위(1769~1845)와 잦은 교류를 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위는 판소리 공연을 관람한 후 한시 12수를 남겼는데(관극절구십이수) 1-2수는 관객이 입장하는 모습, 3-5수는 창자가 판소리를 연행하는 모습, 6수는 창자의 열창으로 분위기가 고조된 관중석의 모습, 7-9수는 창자가 다시 판소리를 연행하는 모습, 10수는 창자의 창을 듣는 시적화자의 느낌, 11-12수는 연희의 파장(罷場) 무렵을 노래한 시이다.

5수에서 고수관-송흥록-염계달-모흥갑-김용운 명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高宋廉牟噪海陬 고송염모는 호남의 소문난 광대

狂歎引我脫詩囚 하 좋아 나를 홀려 시를 잃게 하네

淋漓慷慨金龍運 우렁차고 강개하기는 김용운

演到荊一雁秋 형채기 한 마당은 천하의 절창일세

인구 8000여명의 해미면 사람들이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내포문화예술협회를 창단해 지난 7일 제1회 내포문화예술제를 해미읍성에서 열었다. 이날 지역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신명나는 공연과 유화, 동양화 전시회가 펼쳐졌다. 해미농악단의 길놀이, 판굿과 해미 춤사랑무용단의 교방춤, 조혜경 금이랑슬이랑 가야금병창단의 공연 등에 명창을 배출한 해미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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