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7)명창의 산실 금강하류
■ 기획취재/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7)명창의 산실 금강하류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08.01 14:45
  • 호수 9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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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백·김창룡·정정렬 등 근대5명창 금강하류 출신

김성옥 아들 김정근 장항으로 지주 중고제 소리 맥 이어

 

▲금강하류 출신의 판소리 명창

금강 하류지역은 수심이 깊고 경사가 완만하여 내륙수로 역할을 하는 데는 최적이었다. 금강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서천은 이러한 내륙수로를 이용한 물류의 기지였으며 긴 기수역 구간에서 잡아올린 다량의 수산물은 한산모시와 함께 내륙과의 교역에서 주된 품목이었다. 금강 하류 지역의 높은 생산력은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낳았으며 많은 판소리 명창들을 배출했다.

물류의 중심 강경포

조선조 영조 때 이중환은 <택리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부여·은진에서 비로소 바다 조수와 통하여 백마강 이하 진강(鎭江) 일대는 모두 배편이 통한다. 은진·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서 금강 남쪽 들 가운데에 하나의 큰 도회로 되었다.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물건을 내어 교역한다. 매양 봄·여름 동안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을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 담처럼 벌여있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여 쌓인다.”

강경에서부터 금강 어귀까지를 진강이라 불렀는데 진강을 끼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곧 서천의 강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강을 따라 크고 작은 포구가 발달해 있었고 물류의 중심은 강경포였다.

이처럼 강을 끼고 있는 시장을 강상이라 불렀는데 강경은 대동강을 낀 평양과 낙동강을 낀 대구와 더불어 전국 3대 강상이었다. 내륙 깊숙이 있으면서도 100여톤급 배가 드나들던 강경포구는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물이 넘쳐나던 물류의 중심이었다.

일제 초기부터 반세기 동안 성어기에는 하루에 100여 척의 어선들이 포구에 들어와 생선을 산더미같이 부렸고, 전국에서 상인들이 하루에 2, 3만 명씩 몰려들었다.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연기군 금남면 용포에서 강경장까지 배를 타고 시장을 보러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서천의 강마을 사람들은 포획한 생선이나 수산물을 주로 강경장을 이용해 팔았다.

금강 하구에서 잡히는 생선들은 포구마다 객주가 상주해 있어 수산물의 유통을 장악했다. 객주(客主)는 조선시대 상품 유통과정에서 상층부를 위치를 점하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객주의 본업은 상품의 매매였지만 창고업, 위탁판매업, 운송업, 은행업, 여숙업 등 복잡한 기능을 수행했다. 금강하구 포구에서도 이같은 방식으로 수산물이 유통되었다. 망월리나 옥포리, 와초리 등지의 포구에서도 이같은 객주들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마을 노인들은 증언하고 있다.

명창 10여명 배출한 금강 하류 지역

이처럼 생산력이 왕성한 금강 하류지역은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명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광대 81명의 약전을 싣고 있는데 이들 광대들 가운데 금강 하류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김성옥(논산 강경) 신만엽(익산 여산) 임창학(서천 한산) 최승학(군산 나포) 최상준(서천 한산) 김정근(논산 강경) 황호통(공주) 이동백(서천) 김창룡(서천) 정정렬(익산)

또한 가왕으로 불리는 송흥록은 남원 운봉과 익산 웅포 출생의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최근 후자의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흥록은 김성옥의 처남으로 여산송씨 집안이다.

정정렬은 이동백, 김창룡, 송만갑, 김창환과 함께 근대5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편 김성옥은 강경리 일끗리에서 생장하고 후에 여산으로 이거해 살다 일찍 사망한 것으로 명노식의 조선창극사에 기록돼 있다.

​​​​​​​▲김정근이 이주해 살던 장항읍 성주리 생가터
▲김정근이 이주해 살던 장항읍 성주리 생가터

​​​​​​​용당포로 이주해온 명창 김정근

강경 일끗리에서 출생한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은 장항 빗그뫼(오늘의 성주리)로 이주해 중고제 판소리의 맥을 이었다. 성주리는 용당진사가 있던 용당산과 인접해 있다.

지금의 원수2리 용당산 아래의 마을이 용당리이며 이곳에 있는 용당진, 또는 용당포는 서천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예로부터 군산을 오가는 나룻배가 있었으며 1960년대 초까지 도선장은 이곳에 있었다.

장암리의 전망산과 장암진성이 군사적 요충지이자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용당포는 해양문화와 내륙문화가 만나는 접점이었다.

용당산은 용왕제를 지내던 당집이 있던 곳이다.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에도 기록되고 있는 용당진사(龍堂津祠)는 바로 이를 가리킨다. 백제시대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정부가 주관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용당단이라는 제단이 있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웅진명소(雄津溟所)로 지정돼 용왕제를 지냈으며 웅진에서 향과 축문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전한다. 지금도 정월 초에 장항 물량장에서 풍어제를 지낼 때면 용당산에 먼저 올라 제를 지냈으나 10여년 전부터 이러한 전통마저 끊어졌다.

원수리에서 만난 주민은 여기 용당산은 용의 머리이고 성주리 쪽으로 올라가는 맥은 용의 몸통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도로를 내면서 잘라냈다. 용의 머리가 잘린 것이다. 그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 용당산인데 당집이 있었다. 그래서 용의 머리에 당집이 있다 해서 용당이란 이름이 나왔다. 그 용당을 여기 사람들은 용댕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용당진사가 있던 원수리 용당산
▲용당진사가 있던 원수리 용당산

​​​​​​​이처럼 용당산을 중심으로 한 원수2리는 서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군산 왔다갔다 하는 도선장이 여기에 있었다. 3대가 왔다갔다 하면서 60년대 초까지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포구 주변에는 색시집도 있었다. 용당포는 장항의 중심, 서천의 중심가였다. 금융조합도 여기에 있었고 장도 장항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구장터라고 하는데 장항중학교 담 뒤가 장터였다. 어선이 닿고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주변은 천혜의 어장이었다. 참게, 황복, 뱀장어가 지천이었다.”

이러한 곳으로 김정근이 이주해 김창룡을 낳고 이동백을 가르쳤다. 그가 장항으로 이주해온 이유는 강경 못지않게 번성했던 용당포구와 용당진사에서 지내던 용당굿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본래 무당이었다는 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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