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8)고창 판소리박물관
■ 기획취재/ 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8)고창 판소리박물관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09.05 14:54
  • 호수 9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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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판소리박물관 “비동비서의 중간으로 동편제에 가깝다”

통시적 고찰로 ‘중고제 판소리’ 이해 ‘교육의 장’ 마련 절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창판소리박물관에 전시된 판소리 기원·계보도. 중고제 판소리에 대한 왜곡된 표현이 눈에 띈다.
▲고창판소리박물관에 전시된 판소리 기원·계보도. 중고제 판소리에 대한 왜곡된 표현이 눈에 띈다.
▲신재효 고택에 있는 동리가비
▲신재효 고택에 있는 동리가비

19세기 후반 판소리가 양반사회를 거쳐 궁궐까지 파고들 무렵 신재효는 판소리의 후원자이며 지도자로서, 이론가이자 논평가로서, 또한 수많은 단가와 잡가의 창작자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라북도 고창의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사재를 털어 수많은 소리꾼들을 후원하고 가르치면서 구전되어 오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여섯 마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했으며, 광대가 갖추어야 할 법례를 마련함으로써 판소리를 광대들의 기예가 아닌 예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전북 고창군에서는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전국 유일의 판소리 박물관을 건립하여 판소리와 국악 관련 각종 자료들을 전시함으로써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뉴스서천 취재팀이 지난달 17일 고창을 방문해 신재효 생가와 전국 유일의 판소리박물관을 살펴보았다.


동리 신재효 생가와 판소리박물관은 고창읍성 모양성 정문 부근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된 신재효 고택은 신재효(1912~1884)가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철종1(1850)에 지어진 집이다. 원래는 물을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설계한 운치있는 집이었지만 지금은 연못만 복원해 놓았다. 뒷마당 한 켠에 동리가비(桐里歌碑)’가 서 있다. 1984년 그의 100주기를 맞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 고창문화원, 판소리학회, 판소리보존연구회, 신씨문중에서 건립했다고 비에 적혀있다.

​​​​​​​▲동리 신재효 고택
▲동리 신재효 고택

판소리 여섯마당 정리

신재효는 1812(순조 12) 116일 전북 고창에서 신광흡의 1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신재효는 이름처럼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매우 총명해 근동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학문은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고창군의 형방을 지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1852(철종 3)에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 이익상 밑에서 아전 노릇을 했고, 말년에는 관속이나 광대,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호장(戶長)의 직임에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신재효는 평소 판소리나 춤 같은 기예에 매우 익숙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평소에 뛰어난 학문과 교양을 바탕으로 수많은 고창의 향반들과 사귀었고, 훗날 조정으로부터 빈민들을 구제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란 품계를 받아 명목상 양반이 되었다.

중인이었던 신재효가 천민들의 기예였던 판소리에 천착하게 된 동기는 분명치 않지만 판소리를 가까이 접하며 소리꾼들마다 중구난방이었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표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전 생활을 마친 50대 중반부터 신재효는 본격적으로 판소리 세계에 뛰어든다. 널따란 집을 자신의 호를 따서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 짓고, 그 안에 소리청을 만든 다음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조리 없이 부르는 판소리 사설을 일일이 채록하고,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재효 고택 안에 판소리 후학을 양성하는 모습을 재현해놓은 모습
▲신재효 고택 안에 판소리 후학을 양성하는 모습을 재현해놓은 모습

당시 그는 제자들에게 인물이나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 등을 강조함으로써 판소리의 공연적인 측면을 일깨워주었다. 아울러 그때까지 어른들만 익힐 수 있었던 판소리 교육의 허점을 직시하고, 어린 광대도 판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해 대본을 만들기까지 했다.

판소리는 본래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왈자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열두 마당이 있었다. 신재효는 그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여섯 마당의 사설을 고쳐 쓰고 그 내용을 제자들이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개작 과정에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발견하면 과감히 뜯어고쳤다. 또한 판소리 사설에서 비속적이거나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일정 부분 걸러내 품격을 갖추면서도 극의 진행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더욱 생생한 육담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그를 고창군에서는 한국의 셰익스피어라며 추앙하고 있다.

최초의 여류 명창 배출

그의 소리꾼에 대한 남다른 지원과 체계적인 판소리 교육이 세간에 알려지자 동편제와 서편제의 많은 명창들이 앞 다투어 동리정사에 들어왔다. 그들 외에도 신재효는 80여 명의 기생을 제자로 받아들여 장차 여류 명창의 출현을 예고했다. 신재효는 일찍부터 여성의 고운 목소리가 판소리로 실현될 때 또 다른 미적 정서가 발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재효는 결국 진채선이라는 뛰어난 여성 명창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186711, 신재효는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고 경복궁의 경회루 낙성연에 명창 김세종과 여제자 진채선을 올려 보냈다. 그때 도포 차림에 갓을 쓴 진채선은 흥겨운 몸짓으로 방아타령춘향가등을 불러 좌중의 감탄을 자아냈다. 미모에 득음의 경지에 오른 진채선을 보고 한눈에 반한 흥선대원군은 즉시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해 운현궁에 잡아 두었다.

신재효는 그 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자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한다. 그러다 3년 뒤인 1870(고종 7)에 이르러 도리화가라는 사모곡을 지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신재효에 의해 정리된 판소리 사설은 합리적이며 윤리적이고 흥행성까지 갖추게 돼 본격적인 국민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다.

신재효는 평소 제자들에게 판소리는 우아한 표현의 사설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음악적 기교 역시 뛰어나야 하며,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력도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몇 가지 요건만 제대로 갖추면 판소리가 한시문학과 어깨를 겨눌 수 있으리라 단언했다.

판소리 이론가로서 신재효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 광대가이다. 여기에서 그는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반드시 준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신재효는 판소리를 소리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요건, 인물 치레·사설 치레·득음·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다. 판소리 공연이 소리꾼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고, 관객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신재효는 그렇듯 난마와 같은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법칙을 세웠지만 자신은 소리꾼이 아니었으므로 제자들에게 실기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동편제의 명창 김세종을 동리정사의 소리 선생으로 영입하여 함께 이론과 실전이 결합된 판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판소리 체험 해보는 공간 마련

​​​​​​​▲고창판소리박물관
▲고창판소리박물관

고창판소리박물관은 신재효 및 고창이 배출한 진채선 및 김소희 명창을 기념하고 판소리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신재효 고택 자리에 고창군 군립으로 건립해 2001년 개관했다.

박물관에는 멋마당, 명예의전당, 소리마당, 아니리마당, 발림마당, 혼마당, 다목적실 등 판소리의 특성에 따른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발림마당은 판소리를 실제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관람객이 폭포수 그림이 그려진 소리굴(밀실)에서 실제 성음을 내고 이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어 관람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판소리의 기원과 법제, 명창들의 계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벽면을 장식했다. 여기에 서편제와 동편제의 명창들을 총망라한 계보를 작성해 놓았는데 중고제에 대해서는 비동비서의 중간인데 동편제에 가까운 것이다라는 간단한 설명과 김성옥-김정근-김창룡.이동백에 이르는 계보를 적어놓았다.

이같은 설명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중고제 판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커녕 왜곡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통시적 고찰로 중고제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의 장마련이 절실하다.

​​​​​​​▲고창판소리박물관 전시관
▲고창판소리박물관 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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