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10)김창진, 박동진의 스승
■ 기획/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10)김창진, 박동진의 스승
  • 뉴스서천
  • 승인 2019.11.07 11:43
  • 호수 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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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의 동생 김창진, 무량사에서 10년 독공 끝에 ‘득음’

판교로 낙향, 박동진 가르치고 비운의 삶 마감
▲ 명창 김창진이 남긴 유일한 사진
▲ 명창 김창진이 남긴 유일한 사진

금강 하류의 넓은 충적평야와 기수역을 차지한 서천은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많은 인물들을 낳았다.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형 김창룡에게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명창이 그의 동생인 김창진이다.

김성옥의 중고제 판소리는 아들 김정근으로 이어졌다. 김정근은 충청도 강경리에서 출생해 철종과 고종 양대간에 무숙이타령으로 명성이 있었다 한다.

김정근은 서천 장항으로 이주했는데 장항에서 일곱살의 아들 김창룡과 종천면 도만리 출신의 이동백을 가르쳤다. 김창룡(1870 혹은 1872~1943)은 이동백과 함께 근대5명창의 반열에 드는 명창으로 이동백, 송만갑,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해 후배를 양성했으며, 자가전래의 법제, 즉 중고제를 계승했다. 성대가 좋아 며칠 동안 계속 소리를 해도 목이 상하지 않았다 한다. 다음은 1935125일자 매일신보에 실려있는 김창룡에 대한 평이다.

역시 충청도 태생으로 그의 특장은 적벽가이다. 쾌활한 적벽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직도 원기왕성함을 말하고 있다

무량사에서 10년 독공

▲ 김창진이 10년 독공한 부여 무량사산신각(지금은 삼성각)
▲ 김창진이 10년 독공한 부여 무량사산신각(지금은 삼성각)

김창진(金昌鎭)은 장항 성주리에서 김창룡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1880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하다. 1974년에 나온 <한국 판소리 소사>(신구문화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창진은 1875년 충남 서천 출신인데 김정근의 둘째 아들이며 김창룡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교도 아래 소리 공부를 시작해 수년을 전공하였는데, 그가 판소리의 방향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의 창조와 제작이 제 나름대로 달라지기 시작해 가문의 전통 법제를 어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였지만 그 후로는 각처를 돌아다니며 독공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노재명이 확인한 김정근-김창룡의 호적등본에는 김창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가문의 법제를 따르지 않아 호적에서 제외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김창진은 처음에는 형 김창룡을 따라다니며 고수를 했다고 한다. 예전에 명창들은 수행고수라 하여 자신의 소리를 전문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수와 동행을 했다. 그러나 그 대접은 판이했다. 명창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밥을 먹을 때조차 댓돌 아래서 먹었다는 것이다.

형을 따라다니던 그는 고수생활을 버리고 부여 무량사로 들어갔다. 부여 무량사 삼성각에서 그는 10년간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소리 공부를 했다. 10년을 지내는 동안 입고 있는 옷이 다 떨어져, 거적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런 꼴이 안타까워 무량사의 주지스님이 옷을 한 벌 주었는데, 그 옷을 입으니 사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거적을 쓰고 소리에만 전념했다 한다. 마침내 그는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렀다.

독공으로 일가 이룬 소리, 5명창 능가

서천이 낳은 명창 이동백(1867~1950)은 경상도 진주로 내려가 창원·마산 등지를 주요 활동무대로 삼고 9년간 활동했다. 이후 서울로 와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고종으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원각사에서 김창환·송만갑 등과 함께 창극운동에 참여했다.

일제의 병탄 이후 1912년 원각사가 폐쇄되자 송만갑의 협률사에 참여해 전국을 순회하다 고향인 서천으로 돌아왔다. 수년 후 그는 다시 상경해 장안사·연흥사 등에서 활동하는데 그와 서천에서 동문수학했던 김창룡이 그와 함께 했다. 이 무렵 이동백과 김창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서천 출신 두 명창은 이후 1933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고 판소리 보존과 후학을 기르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김창진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공주 출신의 그의 제자 명창 박동진(1916~2003)은 판소리사에서 많은 증언을 남겼는데 그의 증언은 김창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박동진은 1916년 공주시 무릉동에서 태어났다. 대전공립중학교 졸업반이던 열 여섯 살 때 협률사 공연을 보고 소리에 반해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청양의 손병두의 문하에 들어가 처음 소리를 익혔는데 손씨는 지역 일대를 주름잡던 상쇠꾼(꽹과리)으로 토막잡가를 잘했던 지방 명창이었다 한다. 손병두는 박동진의 재목을 알아보고 근세5명창의 하나인 익산의 정정렬(1876~1938)을 찾아가도록 했다. 공주 갑사에 머물고 있던 정정렬에게서 그는 퇴짜를 맞고 실의에 빠져 있던 중 1933년 판교 너더리의 김창진을 찾았다.

그는 김창진 밑에서 심청가를, 정정렬한테서 춘향가를, 유성준한테서 수궁가, 조학진한테서 적벽가, 박지용한테서 흥부가를 배웠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다가 1968년 최초로 5시간에 걸쳐 판소리 흥부가를 완창하면서 판소리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다음은 그가 2001<국악방송>에 출연해 증언한 내용이다.

김창진 명창은 당신이 공부했을 때의 그 괴로움,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다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여. 지금은 안그러지만 옛날에는 고수, 북치는 고수하고는 한 자리에 앉아 밥을 안 먹어. 당신 형이 김창룡이라고, 한 자리에 앉아 밥을 안먹었어. 그러니까 그 냥반이 자기 형님의 책을 훔쳤어. 공주에서 책을 훔쳐가지고 부여 절로 찾어갔어. 절로 가서 그걸 딱 내놓고, 주먹만한 비상을 사들고가 그걸 내놓음서 나 이 절에서 성공 못하면 나 여기서 죽을라요중이 그 말을 듣겠어요? 고개를 살레살레 내둘렀는데 사흘을 굶고 졸라대니까 그 절의 짚신 삼아 대는 영감이 하나 있어요. 그 영감이 주지한테 말했어요. “저 사람 저러다 죽겠습니다. 내가 한 달에 쌀 서 되를 낼 터이니 공부를 시키십시요그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디 그 공부를 한 내력이라는 것은 말도 못했어요.

부여 무량사에서 10년 공부를 마친 김창진은 서울로 올라왔다. 1931년경 일본 음반회사인 축음기상회 <일축(日蓄)>에서 녹음한 판소리 춘향가 SP음반(유성기 음반)을 낸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 것은 1920년대 후반, 그의 나이 40대 중반으로 보인다.

김창진 명창은 고수로 활동하면서 당대 5명창의 소리를 모두 꿰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독창적인 소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공으로 득음을 한 김창진 명창은 서울로 올라와 소리판에 뛰어들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창으로 인정받았다.

▲공주시 무릉동에 있는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공주시 무릉동에 있는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김창진에게 판소리를 배운 바 있는 나성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창룡과 김창진은 처음에 모두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웠으나 뒤에 선생이 달라서 그랬던지 소리를 다르게 했다 한다. 김창룡은 산골 장작 패는 식으로 소리를 했고 김창진은 이쁜 각시 바느질하는 것 같이 소리했다고 한다.

제자 박동진 명창이 KBS_TV 다큐멘터리 중고제에 출연해 증언한 바에 따르면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이들의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창진이기에 그 소리의 장점을 따서 만든 그의 소리는 5명창을 능가한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김창진처럼 진양조를 느리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걸 삼공잽이 진양이라고 한다.

판교에서 제자 박동진 가르치고 타계

1933년 이동백과 김창룡은 조선성악연구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러나 김창진은 그 직전에 낙향을 했다. 김창진은 김창룡보다 7~8세 연하인데 중고제와 서편제를 섞어서 소리했고 아편을 했기 때문에 김창룡이 가문의 법제를 어겼다 하여 서울에 발을 못붙이게 했다는 증언이 있다.

제가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러 갔을 때는 이미 아편을 시작한 뒤였어요. 그래도 한 점 흩어짐이 없이 소리공부를 시키고는 했습니다

박동진의 증언에 따르면 섬으로 들어가 소리공부를 했다는데 그 섬이 바로 현재 서울시 연수원 앞에 있는 띠섬이다.

판교로 낙향한 김창진은 박동진을 만나 그에게 심청가를 가르쳤다. 박동진의 심청가를 들으면 김창진 소리의 특징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창진은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 타계했다. 정확한 연대도 알 길이 없다. 1930년대 후반 이후로 추정된다. 노재명이 지은 <중고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있다.

김창룡은 서울에 가서 크게 성공했으나 김창진은 서울에 있지 못하고 낙향해 아편을 하다가 미실미라는 마을에서 동가식서가숙하다가 작고했다 한다.(이보형 조사·집필 <판소리 유파> 108. 1992년 문화재 연구소. 나성엽 증언)

▲사극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스승 아지태 역을 맡아 열연하는 김인태. 2018년 9월 작고​
▲사극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스승 아지태 역을 맡아 열연하는 김인태. 2018년 9월 작고​

뉴스서천 취재팀이 미실미라는 동네를 수소문해 찾아나섰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을 찾아보니 판교면 후동리에 마살리들이라는 지명이 보이며 갓굴과 후동리 사이에 있는 들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미실미는 마살리의 와전인 듯 했다. 후동리에 찾아가 마을 어른들에게 물으니 흥림저수지 윗편 들판에 옛날에는 마살메라는 마을이 있었다 한다.

서천에서 중고제를 꽃피운 김정근 가문의 김창룡과 김창진, 그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조상의 피를 물려받았음인지 연예계에서 왕성을 활동을 보이고 있다. 원로 영화배우 고 김인태는 김창룡의 손자이고 김인태의 아들이 영화배우 김수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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