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이야기 둘 - 짧은 만남을 에두른 긴 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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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자양 칼럼위원
  • 승인 2019.12.06 10:44
  • 호수 98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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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스루에(Karlsruhe) 중앙역 역사를 빠져나오는 순간, 십 수 년을 살았던 중북부 독일과는 달리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맑고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는 남독의 소도시 역전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늘 그렇듯 낯선 곳에서 받게 되는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는 사람을 머뭇거리게 한다. 굼뜬 동작으로 전차를 타기 위해 표를 끊고 배차시각표를 훑어 다음 전차의 도착시각을 확인한다. 목적지에 가능한 가장 가까운 곳 까지 전차를 타고 이동한 후, 택시로 갈아타고 묵직한 슈바르쯔발트(Schwarzwald) 북서부의 끝자락 숲 사이 길을 따라 20여 분을 더 달리고 나서야 아담하고 따뜻한 산자락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가운데 담쟁이덩굴을 온통 뒤집어쓰고 그림형제의 동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집 근처에서 대충 내리고는 택시를 보내버렸다. 찾는 집의 주소가 갑자기 사라진데다 시간거리병산으로 마구 올라가는 택시요금을 못 본 척하며 택시기사에게 집을 찾도록 계속 맡겨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려 선 자리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완만한 경사의 마을길을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길 두 어 차례 반복하다 빼곡한 정원수 사이에 숨어있는 허리 높이의 작고 나지막한 나무대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적지 않은 세월동안 비바람을 막아서며 성실한 파수꾼 역할을 해 왔음직한, 낡았지만 단정한 현관문 중앙에 Steiner”(슈타이너)라고 적힌 문패를 찾아냈다. ‘, 바로 이 집이구나!’ 안심 반 반가움 반, 소리 없는 탄성을 목 안으로 꾹꾹 밀어 넣다 갑자기 눈앞에 훅 다가드는 사나운 개조심이란 문구를 발견하곤 잠시 망설였다. 벨을 누르고 그 낮은 나무문 앞에서 서성대다 문득,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 건가 싶어 여정을 되짚어 본다. 집에서 공항까지 2시간, 비행시간만 13시간, 기차로 5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칼스루에 중앙역에서 다시 전차와 택시로 한 시간여, 여기에 앞뒤로 기다리고 지체한 시간과 하루저녁 묵은 시간까지를 더하면 이 만남을 위해 할애한 시간은 족히 이틀이 넘는다. 멀다. 잠시 후 온화하고 단정한 미소를 머금은 한 노파가 열린 현관문 안 그늘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다소 당황한 어조로 인사말을 건넨 객()은 이 분이 슈타이너교수의 부인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곧 이어 부인의 차분한 환대를 받으며 집안으로 인도 됐고,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방문객의 등장을 기다리는 노인을 발견한다. 호기심 가득한 깊은 눈빛, 이 분이구나. 정중한 인사와 함께 노인의 건강에 좋다하여 수 일 전부터 심사숙고 끝에 장만해 들고 간 적포도주를 건네며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한 숨 고른 후 노교수가 만족할 때가지 사전 전화통화로는 미흡했던 본인소개를 하고는 바로 방문목적으로 이어져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이루어진 원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마침내 저술의 동기와 배경, 자료 및 과정, 그리고 글과 그림들 뒤안에 드러나지 않았던 놀랍고도 감동적인 소중한 옛이야기들 까지 꼼꼼히 챙겨듣는다. 방문 당시를 기준으로 두 달 후면 일 세기를 살아온 노인이다. 그럼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기억력과 논리의 정연함은 청년 못지않았고, 방문객의 쏟아지는 질문들에 더욱이 녹슬지 않은 유머감각까지 곁들여진 상세한 답변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끼 때가 된지도 모른 채 두 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고, 부인의 배려로 소박하지만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점심상을 함께 받으며 식탁에서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대강의 맥을 짚을 수 있었던 객은 그제야 3 시간 이상이나 노부부를 붙들어 앉혀 놓고 고문 아닌 고문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죄송한 마음에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짓고 하직인사를 드린 후 현관문을 나섰다. 손녀뻘밖엔 되지 않는 먼데서 온 이방인 방문객을 배웅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현관문까지 나서던 두 분의 모습을 뒤로한 채 뭔지 모를 묘한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슈바르쯔발트의 그 작고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왔다.

    원저자와의 만남 후로도 삼 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지부진하던 번역은 어쨌든 마무리 되어 역서는 세상 빛을 보게 됐다. 안부와 감사를 담은 짧은 편지글과 함께 역서 한 권을 읍내 우체국에 나가 부치고 돌아오는 내내 석연치 않은 무언가로 마음이 개운치 않다. 결국은 한 달 후 90세를 바라보던 교수부인으로부터 답신을 받고서야 그 이유가 드러난다. 직접 손으로 꾹꾹 눌러 쓰신 간결한 편지와 함께 때 지난 부고장을 받아들었다. 단 한 번, 몇 시간의 만남이 전부인 이방인에게 남편의 별세 소식을 알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 생각하신 듯하다. 아마도 슈타이너교수의 101년 인생에서 자신의 저서내용이 궁금해 먼 데서 찾아와 다녀간 흔치않은 방문객이었겠지 싶다. 짧지만 정돈된 답신을 받아 읽으며 거동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팡이에 의지해 현관문까지 나와 객을 배웅하던 노교수부부를 떠올린다.

 

    “그런데요, 사납다는 그 개는 어디 있나요?” “여기에 사나운 치타나 눈표범을 조심하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 아니오.” 객의 질문에 진지한 표정으로 답하던 노교수의 얼굴이 일순간 개구진 어린 아이처럼 밝아지더니 또 보자시며 손을 흔든다. 이틀이 아니다. 번역을 충동질한 사소한 동기에 말려든 순간부터 아니, 책을 처음 접하고 정신줄을 놓은 순간부터 꼽아야 한다면 수십 년을 돌아 달려 찾아와 성사된 짧은 만남을 빌어 겨우 풀린 첫 매듭이다. 마을 언덕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객을 바라보는 두 분의 시선이 희미해질 즈음 길은 짙은 숲 사이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이어진다. 순간 길을 가로질러 재빨리 튀어 달아나는 무언가와 맞닥뜨리자 객은 반사적으로 그 뒤를 쫓아 내달린다. 길고도 먼 여행은 이제 막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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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2019-12-06 20:13:50
치타나 눈표범을 만나는 일은 이번 생에는 없기를...
사나운 개도 마찬가지ㅎ
조심조심 살아가야겠네요 이제부터는 더욱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