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홍매와 청매
■ 모시장터 / 홍매와 청매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0.02.21 08:08
  • 호수 9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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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총각 때 나는 여자에 대한 회화 공포증이 있었다. 여자 앞에만 서면 말을 더듬거리거나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입이 얼어붙어버리는 것이다. 맘에 드는 여인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이 핸디캡 때문에 나는 짝사랑만했지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회화 공포증은 여학교에 근무하면서부터 해소되었다. 이십대 황금기는 짝사랑만하다 세월을 다 보냈으니 청춘시절 연애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내를 만나 이런 것들이 말끔히 해소는 되었으나 그래도 지난날 짝사랑했던 여인 몇몇은 그리움으로 남아 시의 소재가 되곤했다. 대학교 때 짝사랑했던 여대생을 35년 만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곱게 늙었으나 그 옛날 이십대의 난 같은 청초한 모습은 아니었다. 만난 이후부터 그 여인에 대한 그리움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랫동안 내 가슴에 애틋한 그 때 그 모습으로, 명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혼인말을 할 때였다. 지금의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시동인지를 건네주었다. 동료되는 분이 나의 시를 읽고는 아내에게 말했단다.

시를 보니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가 봐. 한 번 알아봐.”

노총각이었으니 충분히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결혼한 후 아내에게 말했다.

그 여자 참 무식하네.”

시는 상징이지 실제 시인은 아니야. 소월의진달래꽃은 이별한 여인이고엄마야 누나야는 산골 소년이지 그게 어디 실제 시인인가?”

그런 소리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 들으니 다시는 그런 말 마시게나.”

이후 아내는 일체의 토를 달지 않았고 내 시를 작품으로 평해주는 냉정한 첫 독자가 되었다.

누구나다 사람이라면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첫눈 같은 애틋한 그리움이 우리에게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이런 것들이 시의 모티프가 되어 때로는 명시를 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술좌석에서 물었다.

요염한 여인이 좋아요? 청초한 여인이 좋아요?”

요염한 여인이 좋다하는 이도 있고 청초한 여인이 좋다하는 이도 있었다.

내 연구실에는 홍매가 있고 옆집엔 청매가 있다. 청매가 먼저 피고 홍매는 늦게 핀다. 청매는 오래 피어있다 지고 홍매는 금세 피었다 진다.

화려하기는 홍매만한 것이 없고 단아하기엔 청매만한 것이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홍매는 요염한 여인이요 청매는 청초한 여인이다. 모르겠다. 젊었을 때는 청초한 여인이 좋았는데 지금은 요염한 여인이 더 좋다.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완전한 사랑이 세상엔 있을까. 아카페적인 종교적인 사랑은 아니어도 세속의 사랑에는 세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친밀감과 열정과 책임감이다. 친밀감은 있어도 열정과 책임감이 없는 우애적 사랑, 열정만 있고 친밀감과 책임감이 없는 낭만적인 사랑, 책임감만 있고 친밀감과 열정이 없는 공허한 사랑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누구나 다 이 세 요소를 골고루 갖출 수가 있을까. 이 세 요소의 꼭지점을 연결하면 아름다운 사랑은 아마도 정삼각형이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삼각형일까. 역삼각형일가 이등변삼각형일까.

나이 들면 아내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나이 들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측은지심일 것이다. 많이도 씹었으니 이도 고장이 나고 오랫동안 걸었으니 무릎도 아프고 먹어야할 약이 늘어만 가니 어찌 측은지심이 들지 않겠는가. 조용하면 숨 쉬는가 안 쉬는가 가만히 귀를 대어 보기도 하니 늦게도 서로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만년의 부부이다.

아내는 홍매같은 여인일까 청매 같은 여인일까. 그도 아니라면 측은지심일까. 요염과 청초 그 중간쯤에 있는, 양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따뜻하고 자상한 청실 홍실의 매듭은 늘그막 측은지심에 있지 않을까.

당신은 세상의 유일한 기쁨

오늘은 이 한 구절을 휘호해보았다. 서시, 왕소군, 양귀비, 우희 네 미인을 다 합쳐놓는다 해도 일생 함께 살아주고 있는 이 측은지심만 한 게 어디 있을까. 그나저나 당신이 있으매 당신만한 기쁨이 세상 천지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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