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백제부흥운동 현장 서천 (2)당의 기벌포 상륙②
■ 기획/백제부흥운동 현장 서천 (2)당의 기벌포 상륙②
  • 뉴스서천
  • 승인 2020.03.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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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배후에 띠를 두른 백제시대 산성, 1차 저지선

화양면 금당리에서 당군 저지…소정방, 천방산에 올라 주둔
▲백제시대 산성
▲백제시대 산성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의 침략을 앞두고 백제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백제의 상좌평이었던 부여성충(扶餘成忠)은 옥중에서 죽을 때 신라와 당의 침입을 예견하고 육로로 쳐들어오는 군사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해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하십시오(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라고 했다

덕물도에서 휴식을 취한 당군은 해로로 남하해 성충의 예언대로 기벌포로 향했다. 의자왕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좌평 의직이 당병은 멀리서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치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처음 육지에 내려서 사기가 정정치 못할 때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인은 대국의 도움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인이 불리함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날쌔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인과 먼저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병은 멀리서 와서 속전할 의욕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할 것이요, 신라인은 앞서 아군에게 여러 번 패하였으므로 지금은 우리 병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오늘의 계획은 당인의 길을 막아 그 군사의 피로함을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를 꺾은 후에 적당한 때를 엿보아 합전(合戰)하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과 신라가 수로와 육로로 협격해 들어오자 의자왕은 귀양가있던 흥수에게 계책을 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흥수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명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해 기각의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원광야에서 대적하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 함)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 함)은 아국의 요로입니다. 일부단창을 만인도 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용사를 가려 가서 지키게 하여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白江(或云 伎伐浦) 炭峴(或云 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라고 말했다.

한편 의직은 개펄을 헤치고 기벌포를 통과해 뭍으로 올라온 당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지만 이미 지리적 요충지를 통과한 당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미 진흙뻘을 지나와 사기가 오른 당군의 수효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백제는 패한 군사를 수습해 웅진강구(雄津江口)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수케 하였으나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좌편 해안으로 나와 산에 올라 진을 치니 아군이 싸워 대패했다.(於是 合兵禦熊津江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與之戰 我軍大敗)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웅진강 입구를 백제군이 지키고 있으므로 왼편 해안으로 올라와 산에 진을 쳤다는 것이다. ‘웅진강구에 대해 학계의 설이 분분하다. 이는 웅진강의 입구라는 뜻으로 공주에서 부여에 이르는 구간의 금강을 옛날에는 웅진강이라 불렀다. 오늘의 문산면 도마천까지 바다였으므로 금강 본류 방향을 가리키는 웅진강구라는 표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화양면 금당리 금하마을에 소정방의 군사를 막기 위한 백제군이 주둔해 있었다 한다. 이에 당군은 뱃머리를 좌측으로 돌려 천방산으로 오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서천군에는 수많은 산성들이 있다.<지도 참조> 산성의 분포를 보면 산천리산성-장구리산성-한성리산성-남산성-옥산리산성-송내리산성이 띠를 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들이 기벌포로 상륙하려는 침투를 저지하는 1차 저지선이었다. 당군은 이를 격파하고 오늘의 길산천(당시에는 바다)을 거슬러 올라 천방산에 진을 친 것이다.
 

▲송내리산성이 있는 마서면 송내리 왕갯산
▲송내리산성이 있는 마서면 송내리 왕갯산
▲옥산리 산성이 있는 장항읍 옥산리 중태산
▲옥산리 산성이 있는 장항읍 옥산리 중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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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의 백제시대 산성

<장항읍>
1. 옥산리 산성:장항읍 옥산리 중태산. 중태산. 테뫼식 산성. 동벽과 남벽이 잘 남아있다. 테뫼산이라고도 함

<서천읍>
2. 태월리 산성:장항읍 태월리 태봉산. 토성 추정. 테뫼식
3. 둔덕리 산성:서천읍 둔덕리. 월명산=지장대:전망대 역할

<마서면>
4. 남산성:서천읍 남산리. 도지정 기념물 96
5. 한성리 산성:마서면 한성리 한성굴(원한성)

6. 송내리 산성:마서면 송내리 왕갯산. 테뫼식 토축산성

<기산면>
7. 산정리 산성:기산면 산정리 장군봉
8. 영모리 산성:기산면 영모리

<시초면>
9. 태성리 산성:시초면 태성리
10. 풍정리 산성:시초면 풍정리

<판교면>
11. 만덕리 산성:판교면 만덕리
12. 저산리 산성:판교면 저산리

<비인면>
13. 장포리 산성:비인면 장포리 포성대
14. 성북리 산성:비인면 성북리
15. 월명산성:비인면 성내리

<종천면>
16. 장구리 산성:종천면 장구리
17. 산천리 산설:종천면 산천리

<문산면>
18. 지원리 산성:문산면 지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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