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누군가를 거울삼아 공부하라
■ 송우영의 고전산책-누군가를 거울삼아 공부하라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20.05.20 13:56
  • 호수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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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사에는 비껴갈 수 없는 전설적인 책이 한 질(?) 있는데 주경 신학자 정암께서 주석하신 필생 역작 신구약성경 주석서가 그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교회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꼽는다는 요한 칼빈이 성경 주석을 쓰면서 요한계시록 3장까지만 주석을 달고 그 후로는 인간이 더 이상은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죄다라며 붓을 놓았던 것에 비해 정암은 담담히 주석서를 써내려갔다.

경전에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때는 옛글에 대한 찬고纂誥가 있어야 하는 부분이 들어 있다. 이때 힘을 실어준 부분이 조익이 쓴 포저집浦渚集26에 실려있는 가례향의서家禮鄕宜序이다.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이렇다.

대개 예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니<周時列國各不同> 그렇다면<然則> 예라는 것은 오직 그 대체를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禮唯其大體無失爾> 그 제도까지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其制不必盡同也> 이른바<所謂> 예는 상황에 맞도록 한다<禮從宜>>는 것이 그것이다.<者此也> 평범해 보이는 서른 자 남짓 이 문장은 고전에 대한 주석의 틈을 열어준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탓에 정암은 포저의 글에 힘입어 훌륭히 성경 주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조선 선비 포저에게 일정량 마음의 빚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터.

그렇다면 포저란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십분의 일의 세금을 걷어야 한다. 십일조 세금을 주창한 인물이다.<포저집 포저연보16233> 물론 이 말은 훗날의 일이고 어려서 포저는 빼어나게 공부한 인물은 아니다. 어린 시절과 십대를 죽기살기로 공부한 또래들에 비해 정작 본인은 그렇게까지 목숨 걸고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다. 그의 초년 스승인 156714세 되던 해 봄 진사 장순張峋에게 사서를 읽은 여헌 장현광으로 공부에 그리 밝지 못하다 하니 그의 사문형 윤근수(정약용의 외증조할아버지인 윤두수의 동생)가 조익을 데려다 맹자부터 강을 하는데 추나라 목공이 전쟁에서 담당 관리가 죽는 모습을 보고도 구하지 않는 백성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맹자에게 묻자 맹자는 이 물음을 되바꾸어서 말하길 임금의 창고에 곡식과 재화가 가득한데도 굶어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도 담당 관리 중 어느 누구도 임금께 아뢴 자가 없다는 점을 꼬집으면서 증자의 말을 인용하는데, “경계하고 경계하라 너에게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戒之戒之 出乎爾者 反乎爾者>”고 말했다.

여기서 출호이반<出乎爾反>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란 선비가 어려서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말하면서 회재晦齋처럼 공부하라고 권한다. 이렇게 공부한 그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27세 첫날에 지은 원조오잠元朝五箴을 본받아 26세가 되던 갑진년 새해 아침 첫날 첫새벽 첫닭이 울 때 일어나 원조잠元朝箴을 짓는데, “오늘 이후의 세월은<차후세월此後歲月> 일분일초 까지도 아끼리라<일각가석一刻可惜> 만약에 또다시 놀고자빠진다면<약부파완若復把翫> 끝난 인생이다.”

기필코<허생야필虛生也必> 포저집 권28 元朝箴> 모두 64256자의 짧은 글로 오로지 공부만 하자고 자신을 다그치는 내용이다. 은 네 자를 한 구로 짓는 것을 원칙으로 자를 끝에 놓는 문장은 전고에 없던 터라 굳이 앞의 부사어 자리가 아닌 끝의 서술어 자리에 놓는 이유는 결심의 단호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학지궁행學之躬行이라했다. 공부는 말로 떠벌이는 것이 아닌 몸으로의 실천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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