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봄날은 간다
■ 모시장터-봄날은 간다
  • 칼럼위원 권기복
  • 승인 2020.05.20 13:58
  • 호수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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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밭에 가서 꼼지락거리는데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 벌써부터 덥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옷소매로 훔치면서 뒷산을 바라보았다. 화첩에 밑그림을 그린 듯 하던 연둣빛 산색이 어느새 녹음이 짙은 완성작으로 들어오면서 산수화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읍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옷차림이 여름 복장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지구온난화 현상 때문에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대신 여름이 그만큼 길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계절 구분 상 봄이어야 하는데, 여름 행색을 하고 있으니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다. 더구나 올해에는 코로나바이러스 침공으로 인하여 봄을 봄답게 보내지 못하였으니 더더욱 애잔한 심정일 뿐이다.

초봄에 개나리와 민들레, 복수초와 산수유, 수선화 등이 노오란 꽃망울을 터뜨리면 진달래는 연분홍 꽃잎으로 답장을 쓰면서 온 세상에 봄이 왔음을 알린다. 이어서 벚꽃이 와르르 꽃잎을 열면서 봄은 절정을 맞이한다. 그 후에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면서 봄은 내내 꽃잔치를 벌인다. 영산홍과 철쭉으로 불그레하게 취한 봄은 아카시아와 이팝꽃 향기를 내뿜으며 잠자리에 들어가서 꿀잠을 청한다.

정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봄은 보다()’의 명사형이라고 한다. 계절적으로 가장 볼거리가 풍부한 만큼 이치에 맞는 말이다. 나는 해마다 봄을 맞이할 때와 봄과 함께 어울릴 때면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봄철 내내 비몽사몽 세계에 젖어 살다가 봄이 끝난 자리에서 눈물과 함께 현실로 되돌아오곤 했었다. 나에겐 진정 한여름 밤의 꿈은 봄날이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꿈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봄철 내내 코로나바이러스 공포에 떨면서 어떤 꽃이 피었다가 지는지, 마음에 담을 수가 없었다. 꽃들과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모든 감정의 스위치를 끈 상태였다. 하루하루를 마음 조아리며 보내는 사이, 보는 눈 없이 꽃들은 제 홀로 피었다가 지면서 손님 없는 잔칫상을 차려놓고 젓가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1953,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때에 앳된 목소리의 여가수가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데뷔한 가수 백설희는 일약 대스타가 되었다. 그 후에 이미자, 조용필, 심수봉, 장사익 등 내로라하던 가수들이 리메이크 하면서 지금까지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가까이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는 화가 한 분과 자별하게 지내는데, 그 분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은 3년 동안 한반도의 남북 끝단을 오가면서 전선을 형성하였기에 전쟁은 그만큼 더 참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은 한반도가 아닌 전 지구촌이며, 전선 또한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숨 쉬는 곳이면 모든 곳이 전선이다. 한국전쟁은 보이는 적과 싸우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피하면 액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이번 전쟁은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워야 한다.

백설희의 목소리가 울려퍼질 때 전쟁은 끝났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도 조만간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지난 한국전쟁이 아픈 상처의 한국사라면, 이번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대자연 앞에서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자성의 인류사가 될 것이다. 다시금 예전처럼 꿈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코로나바이러스를 퇴치시켜달라고 대자연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하면서 나직이 중얼거린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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