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이참에 바뀌어야 할 것들
■ 모시장터 / 이참에 바뀌어야 할 것들
  • 권기복 칼럼위원
  • 승인 2020.11.06 10:09
  • 호수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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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누이가 병이 발생하여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하고, 3일 전에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누이들은 나를 오빠이면서 어버이처럼 여기는 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가 입원한 병원에 가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 1인 외에는 병원 방문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종종 전화를 주고받기는 하지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도 병원의 처사에 대해서는 한 치의 불만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만큼 코로나 감염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건강한 일반인이 감염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외부와의 잦은 접촉으로 인하여 환자가 감염된다면 치명적일 수 있다.

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전 인류의 마스크 착용이다. 예전에는 인도의 바라나시와 같이 시내 공기가 혼탁한 지역을 여행할 때나 특별한 상황에 한하여 마스크를 썼다. 그러나 지금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아마 코로나 상황이 종결되어도 대기 오염과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마스크 착용은 일상적인 풍속으로 남을 것 같다.

어른들은 모임과 회식을 자제하고 전화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안부를 주고받기 일쑤이다. 아이들은 축구나 농구 등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 대신에 모바일 게임이나 유튜브 등에 매료되고 있다. 주부들도 백화점 쇼핑 대신에 인터넷 쇼핑으로 집안에서 해결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면 문화보다 비대면 문화가 일상화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여러 가지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물결은 이미 흘러가고 있다. 이참에 바뀌어야 할 것들이 있다. 필자는 대표적으로 병문안과 애경사 상조 문화를 꼽고 싶다. 이 두 가지는 공동체 사회에서 함께 아픔을 나누고, 서로 돕는 아름다운 풍속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하였다.

병문안을 보자. 누군가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이를 위로해 주고 아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문병을 간다. 코로나 발생 이전의 병문안 풍속도는 환자의 이웃사람들, 친지, 친구들 등으로 인하여 큰 병원들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때로는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고유 업무에 지장을 끼칠 정도이다.

환자 입장에서도 휴식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심신의 안정을 취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웃 사람들은 환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문병을 하고, 친구들은 차후에 차 한 잔 대접하면서 위로해도 괜찮을 것 같다. 굳이 병원에 몰려가서 비좁은 병실을 가득 채우고,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병문안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두 번째로 애경사 상조 상황을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모든 모임에서 애경사 상조가 빠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애경사 상조를 위하여 모임을 갖는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얌체 족속은 집안에 애경사가 있을 만하면, 여러 모임에 가입을 하여 회원 활동을 한다. 그리고는 차후에 모임에서 쏙 빠지는 예도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무엇보다 진실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결혼식 참여를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예식장에 가서도 혼주와 축하 인사를 나누고, 곧장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식장 앞에서 우인들과의 잡담으로 예식 행사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축복 받아야 할 신랑 신부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상가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예전에 애경사는 한 집안의 대사였다. 너나없이 빈곤한 처지였기 때문에 대사를 치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웃과 친구, 친지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 우리들의 상조문화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한 가정의 어려운 형편을 떠나서 서로 빚 갚기이다. ‘네가 부조했으니 나도 한다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 애경사에 하객이 얼마나 되었고, 부조금이 얼마 들어왔다는 것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행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병문안과 애경사 상조를 자제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꼭 함께 해야 할 기회를 빼앗은 아픔도 있지만, 지나치게 과잉으로 치닫는 우리들의 생활문화를 되돌아 볼 기회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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