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1)홍성군 광천읍 옹암포②
■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1)홍성군 광천읍 옹암포②
  • 허정균.주용기 기자
  • 승인 2021.05.27 07:53
  • 호수 105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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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방조제로 물길 막힌 옹암포

외지에서 가져온 새우로 명맥 유지
▲1960년대 지도
▲1960년대 지도
▲2015년 지도
▲2015년 지도
▲옛 충청수영 영보정에서 바라본 보령방조제
▲옛 충청수영 영보정에서 바라본 보령방조제

바닷물이 보령 오천면과 천북면 사이를 뚫고 내륙으로 들어와 거대한 호수와 같은 바다를 차려놓았다. 바닷물은 하루 두 번씩 들고 나며 고기떼를 부려놓고 갔다. 여기에 오서산에서 발원한 광천천, 진죽천이 고기들 먹이를 날라왔다.

물이 빠지면 바다를 둘러싼 홍성군 광천읍, 보령시 천북면, 청소면, 오천면 사람들은 호미 하나만 달랑 들고 갯벌로 모여들었다. 안면도, 원산도, 삽시도, 섬 사람들은 밀물을 따라 옹암포로 와서 새우를 내다팔고 육지의 산물로 바꿔 다시 썰물을 따라 귀로에 올랐다.

이러한 바닷가 마을 주민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린 것은 1991년 착공해 2000년에 완공한 보령방조제이다.

1991년은 우리나라 갯벌이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사라진 해로 기억될 만하다. 이 해에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을 막은 화옹방조제, 충남의 홍성방조제와 보령방조제, 전남 고흥방조제, 그리고 전북의 새만금방조제가 착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갔다.
보령방조제는 20001230일 끝물막이공사를 끝내고 이어 내부 개발에 들어갔다. 농지조성과 수자원 개발이 목적이었다. 2010년 내부개발이 완료 되었지만 지금도 황량한 벌판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보령방조제로 인해 주꾸미, 낙지, 바지락, 백합 등이 지천이던 갯벌이 사라졌다. 갯벌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은 보상금 몇 푼을 쥐고 마을을 떠나야 했다. 수많은 바다 고기들의 산란장이 사라지고 옹암포로 들어오던 뱃길도 막혀버렸다. 광천읍 옹암포는 전남 신안군 등지에서 가져오는 새우로 토굴에서 젓갈을 숙성시켜 옛 명성을 이어갈 뿐 번성했던 포구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장항선 광천역과 대천역 사이에 원죽역-청소역-주포역이 있었는데 원죽역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주포역은 폐쇄됐으며 청소역만 간신히 남아 하루 네 번 무궁화호가 정차한다.

<허정균 기자>

인터뷰 / 빙도 전 이장 전재복씨

바다에서 어업을 해서 먹고 살기에 충분했다

뉴스서천 기획취재팀은 지난 515일 보령시 천북면 낙동리 빙도를 방문해 전재복(1949년생)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빙도 전 이장 전재복씨
빙도 전 이장 전재복씨

- 마을 주민 수가 얼마나 됩니까?

= 저까지 6대째 살아요. 저만 전 씨네고, 김 씨네가 제일 많고. 지금 살고 있는 호수는 전체로 32호에요. 그때 당시에는 35호였어요.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방조제를 막은 후) 새로 들어오신 분은 서너 집 돼요.

- ‘빙도라는 섬 이름의 유례는 어떻게 됩니까?

= 원래 빙도가 아니었어요. 일본 놈들이 한자로 얼음 빙자로 바꾸어 버렸어요. 원래 그 전에는 미인도였어요. 여기에 미인이 많이 태어났다고 해서 그랬어요. 여기서 미인이 태어나면 이십 살을 못 넘기고 죽었대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죠. 전설이니까. 옛날 노인들이 그러시더라고요. ‘빙도라고 한 것은 여기서 일제강점기 때 금광업을 많이 했데요. 금이 그렇게 많았었데요. 그래서 전기도 천북면에서 제일 먼저 들어오고. 그 사람들이 금광을 한다고 철탑을 세워놓고서 전기를 끌어온 거예요. 일제 강점기 때 금광업을 하던 분들은 다 돌아가셨어요.

- 방조제가 없을 때 안면도 사람들이 이 앞으로 배를 타고 다녔습니까?

= 안면도 사람들이 시장을 보러 광천장으로 다녔어요. 바람이 불어서 배가 못 가면 저희 동네에 와서 자고 가고 그랬어요. 밥도 해달라고 하고, 먹고 가고 그랬어요.

- 어업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 어릴 때부터 여기서 살면서 어업을 했어요. 어디 나가지 않고 여기서만 살았어요.

- 방조제를 막기 전에 어업을 하던 상황을 말씀해주시죠.

= 방조제 막은 지가 한 10여 년 됐어요. 보령호 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주로 어업을 많이 했어요. 반지락(바지락) 양식장을 많이 했고, 굴 양식장을 많이 했어요. 물이 빠졌을 때 그렇게 했고. 물이 찼을 때는 꽃게, 왕새우, 이런 것이 많이 나왔거든요. 여기가 주로 산란지라, 고기가 많이 들어왔어요. 천수만 막고, 보령호 막고, 그러고 나서는 고기가 없어요. 이 방조제를 막고 나고 우리 빙도는 사실 고립된 상태에요. 아무것도 못해요. 농사라고 이거 조금 짓는 거. 요것 갖고 유지를 하는데, 옛날에는 부촌이었지요. 바다에 고기도 잡고, 바지락도 잡고, 굴양식도 하고, 겨울에는 굴 철이 아니예요? 굴 다 채취해서 팔고,  배 타고 건너갔다 건너오고. 배로 건너 가가지고 걸어댕겼지요. 옛날 노인네들, 광천까지. 배로 노 저어 가기도 하고, 일부는 배로 맞은편으로 건너가서 걸어도 다니시고 했어요. 노인 양반들이 머리에 이고. 배는 많지 않고 그랬어요. 노 젓는 배로 여기 앞바다, 원산도 부근, 여기 천수만 지구, 여기에서 왕래를 많이 했지요. 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죠. 방조제 바깥쪽으로 원산도까지는 갔죠. 안면도 부근으로. 농어도 낚시하고, 도미 낚시하고. 그랬지요, 옛날에는. 도미, 감성돔도 산란기 때는 많이 들어왔어요. 방조제를 막고 나서 지금은 없어졌어요.

- 방조제를 막은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 그 변화야 얘기를 할 수가 없죠.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죠. 그렇게 부촌이었는데. 이 앞에 있는 농토에서 농사지어서는 먹고는 살고, 바다에서 어업을 해서 벌어서 살기에는 충분했죠. 마을 들어오는 이 앞에서는 60년대까지 염전을 했어요. 방조제 막고 나서는 소득이 아예 없는 상태예요. 그렇다고 해서 농촌공사가 무슨 혜택을 준 것도 없어요. 그 때 생계보상으로 준 것은 몇 십 만원 그랬어요. 그 전에 해태 양식장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전통 지주식이요. 김이 굉장히 잘 됐어요. ‘광천 김으로 알아주는 것이 그 때 김 생산을 한 것이 알려져서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은 방조제 바깥에서 부유식으로 김을 생산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앞에서 지주식으로 김을 생산했어요. 손으로 직접 떠서 햇빛에 말리고 그랬어요.

- 그때 사용하던 어업도구들이 있습니까?
= 다 버리고 없어요.

- 보령호 방조제를 튼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얘기를 해주시죠.

= 안희정 씨가 도지사일 때 처음에는 보령호 방조제를 다 트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안희정 씨가 저렇게 되고 난 뒤에는 무산이 되어버린 거예요. 방조제를 터라 해도 농촌공사에서는 너무 돈이 많이 들어가서 안 된다, 틀 수가 없다그렇게 버티고 있는 거예요.

- 한국농어촌공사가 보령호 안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하겠다고 했는데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 농어촌공사에서 보령호 안에 태양광을 하겠다고 주민 설명회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 주민들은 주민 설명회를 하면 뭐하냐. 당신들이 방조제를 막고 나서는 우리 마을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상태다. 여기 부근 갈대밭 십만 평을 농토로 조성해줘라. 농사를 져야 먹고 살 것 아니냐.”고 했어요. 지금도 한 십 이삼 만평은 농토를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농토라도 만들어서 농사를 짓게 해야 할 것 아니냐고 그러니까, 자기들 하는 소리가 “5년 후에는 아마 개발이 될 겁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뜬 구름 잡기예요? 자기들이 태양광을 하려고 주민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만약 태양광 발전시설을 해버리면 우리 섬이 태양광 발전시설로 싹 둘러싸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우리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업을 해주면서 그런 일을 한다면 모를까, 여름에는 온도가 2, 3도 정도 높아진다고 하는데 사실 주민들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누가 좋다고 하겠냐는 거예요.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서민들은 죽거나 말거나 하는 거예요.

- 보령호 방조제를 막기 시작할 때 주민들이 반대를 많이 했습니까?

= 반대를 많이 했어요. 다른 마을 사람들도 같이 했어요. (방조제를) 못 막게 차로 막고 그랬어요. 이 마을에는 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차가 없었어요. 그래서 경운기를 갖고 가서 막고 그랬어요. 첫째 우리 주민들이 많이 반대를 하러 가고 그랬어요. 원체 정부에서 밀어 부쳐버리니까 방조제가 완공돼 버렸어요.

- 체험마을사업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 코로나19가 발생되기 전에는 어린 학생들이 체험을 오고 그랬어요. 이 부근에 자연적으로 갈대숲이 있고 해서 알려 주고, 연날리기 대회도 하고 했어요. 여기가 바람이 좋잖아요. 관광차가 오고 그랬었는데 코로나19가 발생하고 나서는 오는 사람이 없어요.

<주용기 시민기자>

사진1▲1970년대 옹암포구
사진1▲1970년대 옹암포구
사진2▲옛 포구 자리에 있는 광천토굴새우젓홍보전시관
▲옛 포구 자리에 있는 광천토굴새우젓홍보전시관

 

▲빙도 앞 간척지
▲빙도 앞 간척지
▲녹색체험마을 안내판. 주꾸미잡이 그물이 어업이 성행했음을 알리고 있다
▲녹색체험마을 안내판. 주꾸미잡이 그물이 어업이 성행했음을 알리고 있다
▲폐역이 된 주포역 역사
▲폐역이 된 주포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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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경렬이 2021-06-21 18:06:03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인터뷰한 할아버지의 손자입니다
저희 할아버지 인터뷰로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나는 혜원이 2021-06-21 18:04:02
할아버지가 신문에 나왔다고 하셔서 깜짝 놀라가지고 얼른 인터넷으로 찾아왔어요~ 할아버지를 인터넷에서 보니 정말 신기하네요~ 빙도에 많이 놀러갔어도 빙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는데, 이번에 할아버지 인터뷰로 빙도에 대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어서 좋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혜원경렬맘 2021-06-21 17:57:15
빙도에서 살았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인터뷰 내용으로 몰랐던 내용도 많이 알아 가네요~~ 유익한 인터뷰와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