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서천군 관아(치소-관청)가 걸어온 역사
■ 특집 / 서천군 관아(치소-관청)가 걸어온 역사
  • 박수환 전 한산면장(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승인 2021.05.27 16:49
  • 호수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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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郡). 관아(官衙)-치소(治所

1413년 서림군(서주)을 서천군으로 개칭
세종 때 남산에서 현 오석산으로 치소 이전
▲대동여지도 서천군
▲대동여지도 서천군

금강 하류지역에 터를 잡고 오랜 역사를 이어온 서천군은 남삼한 시대에 여러 부족국가로 나뉘어 있다가 백제시대에는 설림군 또는 남양으로 불리웠다. 관아(치소) 또한 백제시대 마산에서 고려시대에는 남산으로, 조선 세종 때에 와서 현 위치로 옮겼다. 현재 건설 중인 신청사가 완공되면 다시 한번 위치가 바뀔 것이다. 향토사학자이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인 박수환 전 한산면장이 백제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천군의 명칭과 관아의 위치 등을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총정리해 뉴스서천에 보내왔다. 이를 2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 마한시대 (기원전300년)

서천군내에는 비인면, 종천면 지역에는 고인돌이 분포해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통치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그 지역은 부족의 통치자가 생겨났다. 작은 국가를 형성하면서 원삼국시대인 삼한시대 즉, 마한, 진한, 변한시대의 부족국가로 출발하였다 서천지역은 마한지역으로 54개국 중 소국으로(三國志 -위서 동이전의 韓傳),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의 강력한 국가형태가 나타나 부족국가는 흡수되었다. 

- 서천지역 : 아림국(兒林國-서천, 장항, 마서, 시초, 문산지역)
- 한산지역 : 치리국국(致利鞠國 –한산, 마산, 화양, 기산지역)
- 비인지역 : 비미국(卑彌國 –판교, 종천, 비인, 서면지역)

● 백제시대 

<서천군 舒川郡>
 
- 군의 명칭 : 설림군(舌林郡) 또는 남양(南陽)
- 치소 위치 : 현 문산면 신농리(왜멀-옛 왕야리)

 

▲1872년 서천군관아 배치도 
▲1872년 서천군관아 배치도 

백제시대 때 서천군(설림군-舌林郡) 치소(治所)와 진산(鎭山)이 천방산에 이었다 진산이란. 난리를 진압하고 국가(고을)를 지킨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 고을의 주된 산을 진산이라 하고, 또는 진호(鎭護)라고도 했다. 
진산을 배경으로 그 고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고을이 발전하면서 문화가 형성되며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가 둘러쳐져있고 동남북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영산(靈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인 듯 천방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봉우리들은 남으로 가면서 5개의 봉우리가 마치 병풍인 듯 둘러쳐진 모습이 있어 아늑한 감이 있는 천방산은 서북에 동북방향으로 펼쳐진 시원한 풍광이 함께하고 있어 좋은 곳이다.

◯신농리(왜멀-옛.왕야리) 백제 때 서천군의 옛치소(治所-다스리던 곳)
천방산 아래 음적사(陰寂寺)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신농리는 백제 때 설림군(舌林郡)의 치소였다. 조선시대에는 두산동면(豆山洞面) 왕야리(旺野里)로 불렀다. 그곳은 설림군의 치소로, 뒷산이 바로 설림군의 진산(鎭山)이 천방산이다. 

<한산군 韓山郡>

- 군의 명칭 : 마산현(馬山縣)
- 치소 위치 : 마산면 벽오리 – 한산면 지현리(건지산)

한산군의 진산(진산)은 마산면 벽오리 뒷산 월명산이다.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건지산성(우두성, 마산성, 또는 주류성)을 쌓았다. 동성왕은 자주 건지산에 사냥을 나오기도 하였다. 501년 11월 사냥을 나왔다가 폭설로 공주도성으로 환궁을 못하고 마산면 벽오리 치소에 유숙하였다가 임천 가림군 성흥산성 성주 제자백가는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살해하였는데, 뒤를 이은 무령왕은 군사를 이끌고와 건지산에서 성주 백가를 목을 베어 금강에 벼렸던 역사의 산성이다. 나당연합군이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건지산성에서 3년간 풍왕자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한 산성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 통일신라 때 치소(치소)를 건지산 아래 한산면 지현리로 옮겼다. 한산군 읍성은 성종24년(1493년)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만인 연산2년(1496년)1월에 축성완료 하였다 그 후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의하여 서천군에 편입되어 한산면이 되었다.

<비인군 庇仁郡>

- 군의 명칭 : 비중현(比衆縣)
- 군의 치소 : 종천면 산천리(흐리산) - 비인면 성내리(월명산)

비인군의 백제 때 진산은 종천면 산천리(희리산)에 자리하였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치소를 비인면 성내리 월명산 아래에 옮겼다. 비인군 읍성은 세종12년(1430년)12월에 쌓았다,비인군지역은 서해바다를 끼고 있어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약탈의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서면 마랑포구에 수군 군사시설인 마량진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다. 비인읍성은 특이하게 방어의 특성상 동,서 2개만 성문을 설치하여 축성하였다.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의하여 서천군에 편입되어 비인면이 되었다. 

● 통일신라시대

- 군의 명칭 : 서림군(西林郡)
- 치소 위치: 현 문산면 문장리(禾里-화리)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설림군의 치소는 천방산 아래 남쪽, 현재 문산면 문장리 화리(禾里) 마을로 이전하고 서림군(西林郡)으로 군명을 변경하였다. 

● 고려시대

- 군의 명칭 : 서림군(西林郡), 서주(西州)
- 치소 위치 : 현 마서면 봉남리(남산)

그 후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시대에는 오늘날 남산(옛 영취산)으로 치소를 옮기고, 군 명칭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고려 현종9년(1018년)에 가림현(嘉林縣-현재 임천면 소재지)에 지휘를 받는 속현이 되었으며, 監務(西林刺史-감독)을 두어 통치하였다. 충숙왕 원년(1314년)에 이고장 출신 이언충(李彦忠-서림이씨 시조)이 충숙왕 옹립하는 데 공이 있어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승격되어 서주(西州)로 불렀다

● 조선시대 그 후 현재까지 

- 군의 명칭: 서주(西州). 서림군(西林郡) - 서천군(舒川郡)
- 치소 위치 : 서천군 서천읍(오석산 자락) 현재

▲서천군 관아 성곽 배치도
▲서천군 관아 성곽 배치도

고려시대의 군명 서림군(또는 西州)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 오다가 조선 태종13(1413년)10월15일에 서주(西州)를 서천군(舒川郡)으로 개칭하고 남산이 지대가 협소하여 세종(1422년경) 때 지금의 서천읍 군사리 오석산(烏石山 )에 치소를 옮겼다 그 후 세종20년(1438년)에 읍성을 쌓고 600년간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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