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5)보령시 남포
■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5)보령시 남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7.15 03:21
  • 호수 10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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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잠마을 “옛날에는 전라도 경상도 배들 드나들었다”

들판 한가운데 밤섬 “섬 주변에 어패류가 지천이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30년대 지도
▲1930년대 지도
▲1970년대 지도
▲1970년대 지도

보령시 남포(藍浦)는 백제 때 사포현(寺浦縣)이었고, 757년 신라 경덕왕 때에 남포현(藍浦縣)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 舒川郡)에 속했다. 오늘의 보령시 웅천읍, 주산면도 이에 속했다. 1466년 조선 세조 때 남포현이 되었으며, 1895(고종 32) 홍주부 남포군으로 되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1913년 보령군 남포면(藍浦面)으로 되었다.

남포면의 서쪽은 서해가 밀고 들어와 만을 이룬 지형으로 만입한 바다의 갯벌은 남포면 주민들의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이었다. 바지락, , 백합을 채취했으며 배를 타고 나가 민어, 도미, 갈치 등을 잡았다. 1960년대까지 보령염전이 있어 천일염을 생산했다.

만 한가운데에 율도(밤섬)라는 섬 주변에는 어패류가 지천이었고 모래갯벌이 발달해 지금도 논 아래에서 모래 채취를 하고 있다.

이러한 남포만에 두 차례에 걸쳐 개막이 사업(간척사업)이 벌어졌다. 밤섬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방조제 막은 남포간척지공사이다. 1963년 동아건설에 의해 착공되었으며 1971년에 3조의 방조제 총 길이 3383m가 완공됐다. 이로 인해 545ha의 간사지 논이 생겼다.

▲남포방조제
▲1986년 끝물막이 공사가 끝난 남포방조제

2차 간척사업은 부사지구간척사업과 함께 시행한 사업으로 남포지구와 부사지구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10852월에 착공해 3700m의 방조제를 쌓아 198612월 최종 물막이공사가 완료 됐다. 이로써 드나듦이 복잡한 남포면의 해안선은 일직선화 됐고, 방조제 안에 새로 489ha의 농경지가 조성됐다.

뉴스서천 취재팀은 지난 10일 남포면 삼현리 조잠 마을을 방문했다. 삼현리는 남포면에서 가장 큰 포구가 있던 곳이었다. 조척포(造尺浦)라 불리던 포구가 있었던 조잠마을이 지금도 삼현리 남쪽 끝에 지명으로 남아있다.

▲삼현리 조잠마을
▲삼현리 조잠마을

마을 앞은 넓은 바다였고 대천해수욕장을 이루는 긴 반도와 죽도, 밤섬이 파도를 막아주었다. 수십척의 배가 정박했으며 먼바다로 출항하는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고 전라도, 경상도 배도 드나들었다 한다. 배를 짓는 선소도 있었다. 마을 남쪽 끝 바닷가 언덕에 당집이 있었다. 정월 초이틀이나 사흘에 당제를 지냈다.

삼현리 앞 갯벌은 뻘이 많고 조금 때는 물에 잠기지 않아 자염을 굽는 데 천혜의 조건이었다 한다. 벗뚝거리라는 곳은 갯벌에 사구와 같은 곳이 형성돼있는 곳이었다. 물에 잠기지 않은 뻘이 햇볕을 받아 염도가 높아지면 이곳에 사구를 이용해 바닷물을 통과시켜 염도가 높은 바닷물을 만들고 이를 길어다 장작불을 이용 증발시키면 자염이 만들어진다.

1960년대 1차 간척사업으로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남포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육지에 갇히게 되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10여가구가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다. 배는 죽도 앞에 정박시켰다.

삼현2리 마을에서 김동수 이장(1948년생)을 만났다.

- 이 삼현리 마을은 몇 가구나 됩니까?

= 1, 2, 3리로 나누어져요. 1리는 백 이삼십호 정도 될거에요. 1리에 원래 주민은 몇 호 안 되고, 대부분 간척사업 후에 외지에서 모여들어가지고 커졌어요. 이곳 2리가 제가 이장을 보고 있는데 68호가 되요. 순 토백이들이 살아요. 이 씨, 박 씨. 1리는 고 씨가 많이 살아요. 2016년에 3리가 분리되었는데 한 30호 정도 될 거에요. 마을 크고, 도시처럼 집들이 밀집되어 있어요. 간척지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봐야죠. 거의 다 벼농사를 짓고 있어요. 바다를 막기 전에는 바닷물을 큰 솥에 고아 가지고 소금을 만들고 그랬어요. 소금을 굽는다고 했고, ‘자염이라고. 내가 어릴 때 이 앞에서 많이 했어요. 어르신들이 그러더라고요.

- 방조제 막기 전에 어떤 고기들이 잡혔나요?

= 내가 열다섯 살 때 맨 처음 이 앞에서 밤섬(율도)까지 방조제를 막았어요. 막은 지가 59년 됐어요. 그리고 두 번째 방조제를 갓배에서 용두까지 막고, 1985년에 세 번 째인 남포방조제를 막았어요. 방조제 막기 전에는 마을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죠. 예전에 전어, 갈치 같은 것이 있었는데 전어는 불빛을 보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옛날에는 이 동네에 돌로 쌓은 독살이 많이 있었어요. 나머지는 나무로 말장을 박아가지고 그물로 ()살을 만들어서 물고기를 잡고 그랬어요. 내가 열여섯 살 먹었을 때(1963년도) 갈치가 겁나게 들어왔어요. 바지락, 굴 이런 것이 많이 잡혔어요. 이 마을 앞 갯벌에서는 짱뚱이, 망둥이, 황발이(농게), 능쟁이, 칠게가 많이 잡혔어요. 저리 나가서는 꽃게가 잡혔어요. 참조개(백합)가 잡히고 그랬어요. 죽도 앞에서는 백합 양식을 하고 그랬어요. 그곳에는 순 모래였고, (마을) 앞에는 뻘이 었어요.
 

▲밤섬 부근 모래채취를 하고 있는 논
▲밤섬 부근 모래채취를 하고 있는 논

<허정균 기자>
 

주민 인터뷰 / 대웅호 선장 박기수씨

봄바람 많이 불 때면 집 앞 마당까지 바닷물이...

보령시 남포면 삼현2리에 살면서 남포방조제 외측에서 어업을 하는 대웅호 선장 박기수(1948년생)씨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 어업을 하신 지 얼마나 되셨고, 처음에 어업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 어업을 한지 한 60년 됐어요. 내가 12, 13살부터 배를 탔거든요, 아버지랑. 우리가 (이 마을에서) 4대 차니까(째 사니까). 아버지와 나만 어업을 했죠. 할아버지는 어업을 안 하시고, 그냥 농사를 지었어요. 아버지 배로 풍선달고 노 저어갔고. 1톤 정도 되겄죠. 돛달고 바람 잘 불면 한 30분이나 40분 이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사리 때 노 저어서 가면 2시간, 3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어렵죠. 옛날에 아스콘에 까는 골탄이라고 있었는데 그거를 배 엎어놓고 발라갔고 돌 같은 데 부딛쳐서 깨지면 때우고 별거 다했죠. 옛날에는 짚 같은 거로 새끼 꽈서 줄도 만들고 그랬거든요. 줄도 1년에 한 번씩 갈고 그랬지유. (어업을 하는 사람 중에) 마을에서는 내 나이가 제일 적어요.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은 다 돌아가셨지유.

= 마을 앞 선장을 조척포라고도 불렀다는데요?

- 옛날에는 조척포라고 했는데 배는 조금 들어왔어요. 선창이 집 앞으로 쭉 있어갔고, (물고기를 잡아서) 대천과 무창포로 고기를 가지고 가서 팔고 그랬지유. 예전에 봄 바람이 많이 불 때면 집 앞에 마당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지유. 우리 토방 밑에 까지 바닷물 따라서 갈치, 준치가 많이 들어와서 하얂게 나자빠져 있고 그랬어요.

대웅호 선장 박기수씨
대웅호 선장 박기수씨

= 당시에 어떤 물고기가 얼마나 잡혔습니까?

- 그때는 고기가 흔했죠. 갈치, 준치, 목대, 가오리, 꽃게. 꽃게 그런 거는 고기로 치지도 않했죠. 그때는 아구 같은 거 걸리면 집어 내뿔고(내버리고) 그랬어요. 소득이 된 것은 큰 고기, 민어, 도미, 농어 같은 거에요. 그때는 (가격이) 쌋지유, . 주로 갈치, 준치가 많이 잡았시유. 그거를 (지게에) 지고서 포장도 안한 도로를 (걸어서) 어머니랑 광주리에, 다라에다 이고 그 놈을 팔러가고 그랬지유. 우리들도 지게에 지고 다니고, 새벽에 갔다가 (어머니께) 드리고 오죠. (물고기 잡으러) (타고) 나갈라고. 고상(고생) 엄청했시유. 순 자갈밭을 걸어서 지게 지고, 우리 어머니랑 함지를 이고 대천에 갔시유. 우리 집에서 대천까지 12킬로되는디 딱 두 번 시고(쉬고) 갔지유. 그 전에는 주체 못했시유, . 꽃게 같은 거. 지금은 백 분의 일 정도라고 봐야지유.

= 물고기를 팔고 무엇을 사가지고 오셨습니까?

- 거기(대천)서 고기를 팔고, 쌀 같은 거, 고구마 같은 거 바꿔다가 식량을 주로 얻고 그랬죠. 내가 만든 다라에 갈치, 준치 좋은 거를 한 가득 가지고 가야, 쌀 한 말 팔기도 어려웠어요. 쌀 세 대나 네 대 정도 팔아가지고 왔죠. 그래서 매일 (대천으로 물고기를 팔러) 가다시피 한 거요.

= 물고기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잡았습니까?

- , 조개를 겨울에 많이 채취해가지고 갔시유. 여기는 백합도 많았시유. 그랭이로 백합을 잡았지유. 백합 양식장도 많이 있었시유. (지금 모래채취를 하는) 밤섬(율도) 주변으로 순 모래였시유. 마을앞쪽으로는 뻘이 많았지유. 그 전에는 (마을 앞에서) 다른 주민들이 염전을 많이 했거는유. (모래 채취업자들이) 논 한 다랭이 1,500평 짜리를 500만 원씩 주고 모래를 파 가고, 그리고 객토를 해주는디, 지금은 곱이래야, . 한 다랭이에 1200만 원씩 준 다래야. (요즘은) 바다에서 모래를 채취 못하게 하잖아유. (이전에) 바다에서 모래를 채취해 버리니까 고기 산란장이 없어져서 지금은 (바다모래 채취가) 많이 없어졌시유.

= 간척사업은 어떻게 진해되었습니까?

- 우리 앞에가 1호 방조제, 그 옆이 2호 방조제, 그리고 이게 3호 방조제(남포방조제). 1호 방조제는 막은 지가 59년째 됐죠. 그때 (1호 방조제에) 배 같은 거 대기도 곤란하고 해서 막막했죠. 배가 (마을 앞까지) 쑥 들어가지를 못해 버렸어유. 그때도 생태계가 많이 변했어도 다 나왔는데 양만 줄었죠. 그런데 2호 방조제를 막고 나서는 완전히 많이 줄었시유. 그러다가 이것(남포방조제)을 막으니께 완전히 폐업된 것이지유.

= 1985년도에 3호 방조제 막을 때 어업 보상을 받았습니까?

- 배 보상은 받지를 못했어유. 배 가지고 있는 사람들, 생계유지비로 1인당 30만 원씩인가 받았지유. 전라도 사람들 같으면 제대로 보상을 받았을 텐데 여기든 멍청도라서 그러는지 받지도 못했어유.

= 당시 김종필 씨가 충남 출신이라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 (웃으면서) 그렇지유.

= 어업을 하는데 또 어떤 어려운 점이 있습니까?

- 치어같은 것을 살려야 되는디, 안강망으로 큰 배들이 (작은 물고기까지) 다 잡어서 사료로 팔고, 또 오다가 (배에서) 퍼내버리고 그러니까 더 없어졌지유. 시에서 그거 허가를 안내주고 그래야 되는디. 그리고 주꾸미 같은 거를 낚시 허가를 내줘가지고 요맨씩 한 거를(아주 작은 것을) 다 잡아가버리고, 그래서 생태계가 전멸될 것 같애요. 해마다 틀려요(달라요). 작년 틀리고(다르고), 올해 틀리고(다르고). 없어요. 안 나요. 여기 가계(식당)에서 팔 거를 한 십일 만에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10킬로, 15킬로 정도 잡아오고 그래요.

= 어디 손님들이 많이 옵니까?

- 전주 사람이 회를 먹으러 여기까지 와요. 사 가고 그래요.

= 또 다른 어려운 점이 있습니까?

- 지금 공군부대에서 포사격장으로 쓰고 있어유. 바다에다가 쏘고 있어유. 모형 비행기에 깃발을 달아서 띄워놓고 사격을 해유. 큰 사고는 없는데 우리가 어장을 못하잖아유. 오염도 많이 되죠. 주꾸미 같은 거, 가제 같은 것이 탄피를 물고 올라와요. 여기 아마 탄피가 수도 없을 거유. 그렇게 쏜 지가 오래됐지유.

= 이곳 죽도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 여기서 한 2킬로 떨어져 있어유. 저 방조제 끄트머리, 방조제 바로 옆 바다에다 쏴요. 20메다(미터)도 안 돼요. 우리가 그런 것을 해야 하는디, 누가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죠. 어촌계장이랑 선주협회 회장이랑 있기는 하는디유, 여기 죽도가 피해를 제일 많이 보거든유. 엊그제 (바다속에서 건져 올린) 모형 비행기 엔진을 사진 찍어서 대전에 있는 부대에 보냈는디, 답변이 왔더라고. 부대 사람이 얼마나 피해를 봤냐고 묻기에 그물 10폭이 없어졌다. 한 폭에 50000 원씩이다.” 했어유. 상신한다고 해서 어제 서류 붙여줬어유. 상인회장이랑 시청 같은 곳에 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니고 있어요.

= 몇 년 전에 방조제 앞에 뻘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 변하더라고. 물이 바꿔져서 그런가 매이드라고(쌓이드라고). 멀리서 모래가 와서 차이드라고. 지금은 단단해졌어유.

= 근래에는 어떤 물고기들이 잡혔습니까?

- 꽃게, 간재미, 도다리, 대하 같은 거 다 나와요. 조금씩은 다 나와요. 봄에는 주꾸미, 4,5월 달에는 꽃게, 오징어(갑오징어), 가을에는 대하를 잡아요. 내가 어업 허가가 난 것은 세 거지에요. 주꾸미 잡이하고, 자망 하고, 대하 어업이에요. 대하 어망은 비싸서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 죽도항에) 30척 중에 (대하를 잡는 어망 허가가) 세 대가 있나 그럴 거에요. 포구에 있는 배들은 여기 근방에서 다 나와 있어유.

= 어업 단속은 얼마나 합니까?

- 해경 돌아다니지, 전라도에서 단속선 무궁화 뜨지, 보령시청 배 뜨지. 큰 배들은 단속도 안 하고, 맨 째끄만(작은) 배만 단속을 해요. 올해만 여기 배가 두 번이나 걸렸시유. 금어기 때유. 우리는 금어기 때 꽃게 안 잡거든. 소라, 오징어(갑오징어)는 금어기와 상관없거든. 그런 거라도 조금씩 잡아다가 팔아야 식당을 유지하잖유. 올해 갑오징어가 없었어유. 귀했어유.

= 올해 주꾸미 잡이는 어떠했습니까?

- (주꾸미 잡이 때) 한 등청이에 소라 70개를 달거든요. (그것을 바다속에 넣으면) 하나도 없을 때도 있고, 또 한 두 개 잡을 때도 있고, 한 댓() 마리 잡을 때도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제 어려워서 (어업을) 더 이상 못하겠어유.

<주용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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