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9)부여군 ‘입포(笠浦)’
■ 기획취재/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9)부여군 ‘입포(笠浦)’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9.01 18:37
  • 호수 10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날에는 활기찬 동네…강경포구만큼 유명했던 갓개포구”

하굿둑으로 포구기능 상실 ‘박제화’ 진행…‘시간이 멈춘 마을’

기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강경포구가 있던 곳. 배 모양의 건물은 강경젓갈전시관
▲강경포구가 있던 곳. 배 모양의 건물은 강경젓갈전시관
▲1920년대 강경포구 모습
▲1920년대 강경포구 모습
​​​​​​​▲갓개포구가 있던 자리
▲갓개포구가 있던 자리

​​​​​​​금강은 장소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다. <택리지>에 따르면 금강의 근원이 되는 상류지역을 적등강(赤登江)이라 하고, 공주 부근을 웅진강, 그 아래를 백마강, 강경강이라 했으며 또 서쪽으로 구부러져 조수가 드나들던 하류는 진강(鎭江)이라 불렀다.

강경에 이르러 강폭은 넓어지며 기름진 들판을 적신 탁한 물이 흘러든다. 하구로부터는 밀물을 타고 바닷물이 역류해 올라왔다.

강경시내까지 파고드는 조수는 곡창지대와 칠산바다 황금어장을 연결하는 교통 인프라 역할을 하여 강경을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조기의 성어기인 3~6월에는 하루 백 여척의 배가 드나들었고 여각, 객주, 상선을 갖춘 거상들이 이곳을 찾았다. 서해의 각종 수산물이 이곳으로 들어와 내륙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1912년 군산선 철도의 개통과 도로의 발달로 차츰 기능이 쇠퇴해갔지만 해방 이후에도 군산과 강경을 잇는 여객선이 오갔으며, 서해의 수산물을 실은 배들이 밀물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1990년 금강하굿둑으로 막혀 포구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젓갈 시장으로 옛 명성을 잇고 있다.

우여잡이 중심지 갓개포구

▲번성을 누렸던 입포(갓개)
▲번성을 누렸던 입포(갓개)

강경포구 취재를 마친 뉴스서천 취재팀은 지난 달 20일 황산대교를 건너 부여군 양화면 면소재지가 있는 입포리로 향했다. 입포는 우리말로 갓개라고도 불린다. 마을 뒷산 용인산이 삿갓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금강의 지류인 입포천 하구에 들어선 입포는 예로부터 금강하류 우여잡이의 중심이었다. 청어목 멸치과의 우여(위어 葦魚)는 봄이면 산란을 위해 갈대밭이 있는 기수역으로 올라왔다. 강가의 주민들은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이용한 정치망으로도 우여떼를 대량으로 포획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금강 하류지역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다룬 장편소설에서는 갓개포구의 우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갓개포에 넘치는 해물들은 소금을 뒤집어쓰고 빛을 발했다. 한 절기로 넘치는 우여떼들이 몰릴 때 선어로 처리했던 우어들을 소금에 재웠다. 그간에 없던 물목이었다. 사가는 이도 없던 우여를 금석은 염장 우여로 만들어 부여와 공주목까지 거룻배로 실어 시장 난전에 풀었다. 옛 백제의 한을 품은 물고기, 일명 웅어는 날씨가 더워지기 전까지는 살 속의 뼈가 없는 듯했다. 생으로 먹으면 식감이 좋았다. 날것으로 먹을 때, 백제의 멸망이 한으로 뼈조차 삭아 없다는 우어를 백제의 한을 지닌 백강의 사람들은 잊지 못하고 있다.
- 김홍정 역사소설 <금강>에서-

우여는 주로 바다에 살며, 산란후엔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산어보에 의하면, 우여회가 횟감 중 으뜸이라 적혀 있고, 유득공이 펴낸 경도잡지에는 조선시대 사옹원 관리들이 한강 하류 행주산성 부근에 임시관청인 위어소를 설치하여 이른 봄에 우여를 잡아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산물 판매가 이루어지던 입포 어업조합 건물
▲수산물 판매가 이루어지던 입포 어업조합 건물

 

▲금강하구 주요 포구와 나루
▲금강하구 주요 포구와 나루

정기여객선 운항하며 번성

입포는 여객선이 출입하는 강경과 군산 간의 수운 노선의 중간 항이었다. 강경과 군산을 왕복하는 여객선은 정기선인데 그 회사를 강경에 두었다. 그것은 강경이 조선시대부터 발달하여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컸던 것에 기인한다. 정기선은 1932년경부터 운항되기 시작하여 광복 후까지 지속되었으나 1952년 자유당 정부시절 화양면 망월리 금강앞 바다에서 군산~강경간을 운행하는 여객선 전복 사고로 많은 학생들과 일반 승객등 93명이 희생된 최대 해상사고가 발생 한 이후 중단됐다. 정기선의 수운 노선은 군산에서 강경 방향으로 군산화양 망월리와포완포나포웅포시음리내성리입포(남당)칠산성당세도(다근이)강경 순으로 운항했다.

입포 포구는 수운 발달에 힘입어 1932년 시장이 개장되고 생선을 실은 배가 물때를 맞추어 100여척씩 몰려와 생선시장을 형성했다. 이곳 입포의 생선시장에서 객주가 생선 판매 및 안내를 했다. 또한 소금도 부여, 청양까지 공급했다.

입포 포구는 금융기관 및 전화전신 등이 구비되어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내륙 지역과 군산 개항장을 잇는 중요한 중계지 역할을 했으며 입포에서 군산항까지 수송 수단은 큰 규모의 목선이 이용되었다.

포구를 나갈 때는 주변의 내륙 지역에서 실어 온 쌀, 보리 등의 농산물을 선적하여 이동하지만 돌아올 때는 유류, 성냥, 마포, 비단, 건어, 명태 등의 생활필수품을 구입하여 가져왔다. 입포에서 5일장과 생선이 포구에 들어올 때 서는 시장은 별도로 운영되었다.

5일장은 입포 포구로 들어온 생선을 소매하는 역할을 하였다. 입포의 5일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소매할 물건을 구입하는 장소는 중심시장인 군산과 강경이었으며 인근 부여 일원, 홍산, 은산, 임천, 충화 등지의 주민들이 입포 5일장을 이용했다.

정기시장은 모두 상설시장화 할 수 없다. 농촌의 경제활동에 따른 그 나름대로 존재할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입포는 3, 8일에 오일장이 열린다.

우여축제 열며 회생 기도

▲우여축제 전단
▲우여축제 전단

1990년 금강하굿둑이 막히며 입포포구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기존의 시설들은 박제화되기 시작했다. 40년 전에 시간이 멈춘 모습을 입포에 가면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양화면에 따르면 인구도 19801100명에서 2010336명으로 줄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2004년에 외지에서 우여를 들여와 갓개포구우여축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금강 하류에서 우여가 사라진 이상 오래 갈 리 없었다. 20129회까지 열다 중단됐다.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 갓개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65년을 살았다는 주민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옛날에는 활기찬 동네였어요. 강경포구만큼 유명했잖아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을 생각하면 그때 중선배들이 이 포구로 다 들어왔어요. 바닷배들이 다 들어왔어요. 그때 당시에 (이곳에) 시장 형성이 잘 되어 있었지. 아가씨 집이여, 여관이여, 많았었지. 객주집도 몇 있었고...

<허정균 기자>

 

주민 인터뷰

생선 비린내로 타관사람들은 코 막고 다녔다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 갓개마을에서 노행윤(1945년생)씨 만나 얘기를 들었다.

​​​​​​​▲갓개마을 주민 노행윤씨
▲갓개마을 주민 노행윤씨

- 금강하굿둑 막기 전에 어디에서 배들이 많이 들어왔습니까?

= 고군산, 서산, 전남지역 등 여러 곳에서 배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1975년도까지는 그런 배들이 계속 들어왔시유. 들어오는 배가 많지 않았어도 그때까지 계속 배가 들어왔시유. 방조제를 막고 나서는 아예 안 들어왔지.

- 어떤 배들이 많이 들어왔습니까?

= 홍어배, 조기배, 깡치배, 갈치배, 아지배, 새우젓배같은 것이에요. 배 사람들이 (생선들을) 가지고 와서 여기와서 파는 거지요.

- 여기로 들어온 생선들은 어디로 팔려나갔습니까?

= 대전, 공주, 청양, 천안같은 곳으로 나갔지. 안 나간 데가 없었어.

- 안 팔린 생선은 어떻게 했습니까?

= 안 팔린 것들은 여기서 젓()담고, 조기젓을 담고 그랬어. 깡치로 젓을 담아서 젓국으로 팔고 그랬잖여. 김장하는데 썻지. (생선을) 엮어서 팔고 그랬어.

- 생선을 팔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 중개인들이 여기서 많이 살았어. 장사꾼들이 멀리서 오면 중개인들이 그 사람들에게 팔고 그랬지. 당시에 쓰레쿼타’(쓰리쿼터, 3/4톤 트럭)라는 트럭이 있어서 그것에 실고 가고 그랬지. 군대차처럼 생겼지.

- 비어있는 저 건물은 예전에 무슨 용도로 사용했습니까?

= 어업조합 창고였어. 배가 들어오면 거기에 조합장이 있었어. 생선이 들어오면 배 하나를 놓고 경매를 했어. 그러면 입찰된 사람이 퍼놓고 사로 온 사람들에게 팔거나 다른 데로 팔고 그랬지.

- 배가 많이 들어올 때 마을 풍경이 어떠했습니까?

= 배가 많이 들어오면 동네가 비린내(비린 냄새) 나고 해서 타관 사람들이 오면 코를 막고 다니드란게. 선원들이 많이 들어와서 돈 쓰고, 장사꾼들도 많고, 새악시도 많고 그랬지.

- 당시에 갓개마을 사람들은 어업을 했습니까?

= 그 때 당시에 여기 마을 사람들은 배 사업을 안 했어. 할 줄도 모르고. 나중에 여기 사람들이 배 사업하다가 절단나고 돈만 내삐리고(내버리고) 다 이사를 가고 그랬어. 그 사람들이 연평도같은디로 조기잡으러 갔다가 돈만 내삐린 거여.

- 여기 금강 앞에서는 무엇을 잡았습니까?

= 여기는 우여가 나왔어. 그때는 작은 배로 잡았지. 여기에 큰 배는 없었어. 작은 배도 많지 않았어. 빠가사리, 참게같은 거 여러가지를 잡기도 했지. 복쟁이(복어)도 잡고. 그것도 부여같은 데로도 팔려 나갔지. 한동안 재첩도 잡고 그랬어. 글갱이를 배로 끌고 다니면서 잡았지. 재첩이 부산으로 팔려나가고 그랬지. 여기서 중개인이 차에 실고 부산으로 가서 팔러 가고 그랬어.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안 썻어.

- 강경이나 군산으로 배를 타고 다니기도 했습니까?

= 차가 없은게 하루에 두 번씩 왔다 갔다 했지. 군산서 강경, 강경서 군산을 왔다 갔다 하는 배였어. 강경, 갓개, 웅포, 화양, 이렇게 들려다가 군산을 가고 그랬어. 발통기 배이긴 한디 썰물일 때 군산으로 가고 들물일 때 강경으로 들어오고 그랬어. 여객선처럼 많이 탓어. 사람이 많이 타면 100명도 넘게 타고 그랬어.

- 당시에 갓개가 강경이나 웅포에 비해 얼마나 컷습니까?

= 강경이 여기보다 컷고, 웅포는 여기보다 적었어.

- 수해피해를 입기도 했습니까?

= 수해가 나서 난리가 나기도 했지. 제방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어. 비가 많이 오고, (화양면 가신리에 있는) 저수지가 터지는 바람에. 그때는 금강물은 별로 없었어. 하굿둑에서 물을 빼갖고.

- 이곳에 사람이 많이 살 때는 얼마나 살았습니까?

= 150채가 되었어. (집집마다) 남은 셋방이 없었어. 셋방살이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 공무원들도 멀리서 오면 방을 얻어가지고 살았지. 한 집안에 몇 집썩 살았어. 실제 가구수는 훨씬 많았지. 삼사백 가구는 됐어. 여기에 배가 들어오고 ()벌이가 좋은 게, 객지서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얻어먹다시피 하고 그랬어. 셋방이 없으면 시장 다리에다가 천막치고 살고 그랬어.

- 그러면 인구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 애들이 크고 나가고. 지금은 두 식구, 많이 살아야 네 식구지. 지금은 많아야 70가구 되지. 집 띧긴디도(뜯긴 곳도) 많여.

- 그러면 지금이 좋습니까? 그때가 좋았습니까?

= 그때가 좋았지. 도둑놈이 있어도 지금처럼 잡아넣지도 않고, 그냥 혼내기만 하고 내보내주고 그랬어. 큰 도둑놈만 아니라면.

<주용기 시민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