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개봉부 판관 포청천과 구양수
■ 송우영의 고전산책 / 개봉부 판관 포청천과 구양수
  • 송우영
  • 승인 2022.03.18 19:51
  • 호수 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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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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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반복적 습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과 같은 것이고<>, 몸으로 체득되어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은 성현의 말씀 곧 도인 바 품성稟性의 바름을 우선한다. 그 내용은 실천으로 나아감<>이다.

그러므로 어려서는 공부를 많이 하여 일생을 바르게 나아가는 본으로 삼는다. 이를 소식蘇軾은 자신의 제자 진관秦觀을 가르치면서 기도양진技道兩進이라 했다. 이 말은 훗날 문학용어로 자리잡는데 소식이 제자 진관의 시문집 발문에서 한 말이다.<발진소유서跋秦少遊書>

진관은 원풍元豊 원년(1078) 29세 때 경사京師에 가서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진관은 어려서부터 모친에게서 공부했다. 공부 방법이라야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냥 무작정 읽고 쓰고 외우고를 그야말로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과거에 낙방한 아들에게 모친은 아들이 과거에 낙방한 것은 자신이 글이 부족해 더 깊이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며 27세나 된 아들을 소동파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한다.

아들은 소동파 문하에서 공부하면서도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매번 낙방한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갈아보기로 하는데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냐마는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을 갈 수는 없고 해서 자36세 되던 해 정월에 태허太虛로 바꾼다.

일반적으로 아호雅號일지라도 몇 개씩 더 지어서 사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미 지어진 아호를 버리거나 바꾸는 경우는 없다. 특히 자는 두 개인 경우가 아주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자는 태어날 때 이름을 보해서 짓든가 아니면 성인식 때 자를 받기 때문에 태어남이든 성인식이든 두 번 치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암튼 그해에 등과한다. 그의 나이36세 원풍81085년 때의 일이다. 등과 후 그의 이름은 그야말로 천하를 떨친다.

모친에게서 공부한 인물을 꼽는다면 또 한 사람 있으니 그보다 조금 앞선 인물 42세 연배 구양수歐陽修가 그다. 4세 때 아버지 구양관歐陽觀을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공부한 인물이다. 약관의 20세인 1027년 진사시進士試로 등과하여 죽기 1년 전인 1071년 퇴관할 때까지 당대 제1의 문호로서 후대에 이르러는 당8대가 중 한 사람으로 그야말로 일생을 쟁쟁하게 살다간 인물이다. 그가 개봉부 판관으로 재임 시에는 개봉부가 송사하는 사람들이 없어 마치 절간처럼 조용했다 전한다.

그의 전임 판관은 포청천으로 알려진 검은 얼굴에 이마 한가운데 초승달을 달고 태어났다는 형명학刑名學의 법가法家 포증이다. 그는 부임하면서 황제에게 세 개의 작두를 하사받아 형벌을 가했는데 왕손의 일가붙이 잘못에는 용작두로, 대부와 관료 벼슬아치의 잘못에는 호작두로, 범부들의 잘못에는 개작두로 형을 집행했다 한다.

후임으로 온 판관 구양수는 세 개의 작두가 인간적이지 않다 하여 모두 치웠으며 논어 요왈편2장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다섯가지 미덕으로 다스린다.
군자는 베풀되 헤프지 않으며<혜이불비惠而不費>, 부리되 원망을 사지 않으며<노이불원勞而不怨>, 바라되 탐하지 않으며<욕이불탐欲而不貪>,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으며<태이불교泰而不驕>, 위엄 있으되 사납지 않다<위이불맹威而不猛>. 그가 부친 사후 60년 만에 그의나이 71세 때 세웠다는 묘비명에서 그의 삶을 볼 수 있다.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신다.<태부인고지太夫人告之> 너의 아버지는 관리일 때 청렴하셨으며<여부위리汝父爲吏>, 베풀기를 좋아하셨으며<염이호시여廉而好施與>, 손님을 기쁘게 맞이하셨으며<희빈객喜賓客>, 그 받는 봉록이 비록 박했으나<기봉록수박其俸祿雖薄> 늘 재물을 모으지 못하게 하셨나니<상불사유여常不使有餘>. 또 말씀하시길<> 이 재물 모으는 일로 내게 누가 없게 하시오<무이시위아루毌以是爲我累>.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에 아들인 나 구양수는 눈물로 흐느끼며 아룁니다<소자수읍이언왈小子修泣而言曰>. 오호라<오호嗚呼> 착한 일을 하면 응답받지 않음이 없나니<위선무불보爲善無不報>, 다만 응답의 시간이 더디고 빠름의 때만 있나니<이지속유시而遲速有時>, 이것이 바르게 살아서 받는 당연한 이치입니다<차리지상야此理之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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