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23) / 씨동무
■ 박일환의 낱말여행 (23) / 씨동무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2.11.24 07:52
  • 호수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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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중에서도 으뜸인 동무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윤석중이 쓰고 홍난파가 작곡한 동요에 <달맞이>가 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로 시작하는 노래다. 그런데 노래 가사를 잘 듣고 있으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가라면 보통 걷기조차 힘들 만큼 나이 어린 아이를 지칭하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안거나 손을 잡고 데려 나와야 할 텐데 아가를 향해 나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우연찮게 가사를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풀렸다. 애초의 가사는 아가야가 아니라 동무들아였다는 걸 알았을 때, 왜 그렇게 바꿨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동무라는 말이 북한에서 어떤 용법으로 쓰이고 있는지 모를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친구(親舊)라는 한자어 대신 우리말 동무를 마음 놓고 쓸 수 없게 된 건 퍽 아쉬운 일이다. 그나마 어깨동무나 길동무 같은 말이 아직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남아 있다는 걸로 위안 삼아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런 말들 곁에 씨동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쓰는 이들이 점점 줄면서 거의 잊히고 있는 중이다. 씨동무라고 하니까 잊지 못할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안상학 시인의 시집 안동소주씨동무 박일환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기 때문이다.

무척 오래전의 일이다. 구로동 근처에서 호프집을 빌려 내가 관여하던 잡지 삶이 보이는 창의 송년회를 할 때 안상학 시인이 참석했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서로 얼굴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안상학 시인이 먼저 내게로 와서 말을 걸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 헤어진 친구 이름이 박일환인데, 혹시 내가 아닐까 해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전에 내 이름이 들어간 시를 읽었던 터라 묘한 일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그 박일환이라고 대답해줄 수 있었다면 서로 얼마나 반가웠을까? 비슷한 또래이긴 하지만 내가 한 살 많았고, 더구나 나는 청주 출신이라 어릴 적에 안동 근처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내 대답에 안상학 시인은 잠시 멋쩍어했지만 그런 방식으로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세상에 동명이인이 많기는 하지만 내 이름이 누군가의 시에서 제목으로 쓰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면서 씨동무라는 말이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와 박혔다. 그나저나 씨동무라는 말이 참 재미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소중한 친구라는 정도로 너무 간단하고 성의없이 풀이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다. 씨앗의 단계에서 만난 친구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씨앗처럼 소중한 친구라고 풀이할 수도 있겠다. 누구나 그런 씨동무들이 있었을 텐데, 살면서 헤어졌다가 먼 훗날 다시 만나기도 하지 않을까? 나는 일곱 살에 서울로 이사를 왔고, 서울에서도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는 동안 어릴 적 동무들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 내 씨동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그중에 어느 누구라도 박일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씨동무를 생각하고는 있을까?

안상학 시인의 시에서 일환이가 살던 집은 마을 첫머리에 있었다고 했다. 본래 그 고장에 살던 게 아니라 서울에서 살다 왔고, 나중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서 소식이 끊겼다고도 했다. 그러니 안상학 시인이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던 나를 자신의 어릴 적 씨동무였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에는 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라고 하는 옛 노래 가사를 인용한 부분도 있다. 그런 노래가 있었다는 것도 한동안 잊고 살았구나 싶었다. 이 글을 읽으며 동무 중에도 으뜸인 씨동무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내 마음도 절로 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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