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45)/누리
■ 박일환의 낱말여행 (45)/누리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5.11 12:08
  • 호수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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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낱말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박이 내렸다는 기록이 2000건 이상 나온다. 단순히 우박이 내렸다는 사실만 전하는 것도 있으나 우박으로 인한 피해를 전하는 내용도 많다. 우박은 농작물을 해칠 뿐만 아니라 덩이가 큰 것들은 가축이나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구성(龜城) 12개 고을에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바리때와 쟁반만 한 우박이 내렸다. 우박에 맞아 사람과 가축이 죽고 온갖 곡식과 초목이 꺾이고 부러져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현종실록 10, 1665616.)

우박의 크기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와 쟁반만 하다고 했으니 사람이 맞아 죽을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실록에 우박에 대한 기록이 많은 건 우박이 자연재해와 연결되고, 그로 인해 농민들이 커다란 피해를 당하곤 했기 때문이다.

우박(雨雹)은 한자로 된 낱말이다. 그렇다면 우박에 해당하는 고유어도 있지 않았을까?

누리: 큰 물방울들이 공중에서 갑자기 찬 기운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얼음덩어리. 크기는 지름 5mm쯤 되며, 주로 적란운에서 내린다.

누리라고 하면 보통 세상을 뜻하는 옛말로만 알고 있을 테지만 우박을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 그런가 하면 풀무치를 누리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누리에 담긴 이런 용법은 거의 잊히고 말았다. 다만 세상을 뜻하는 누리는 홀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어도 온누리 같은 말에 붙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넷 등장 이후에는 네티즌을 순화한 용어로 누리꾼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쓰고 있기도 하다.

누리가 우박을 뜻하던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건 대개 정지용 시인을 사랑하는 독자나 연구자들일 것이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 누뤼라는 낱말이 여러 차례 나오기 때문이다.

누뤼알이 참벌처럼 옮겨 간다.(비로봉)

투명한 보랏빛 누뤼알(유리창2)

황혼에/누뤼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구성동(九城洞))

누리대신 누뤼를 썼는데, 국어사전에서는 누뤼를 강원, 경상, 충청 지역의 방언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지용 시인이 충북 옥천 출신이므로 어릴 적 고향에서 들어왔던 누뤼라는 낱말이 귀에 익어서 그랬을 것이다. ‘누뤼알은 우박 알갱이나 우박 덩어리를 뜻하는 말이다. 농민들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을 우박을 정지용 시인은 꽤 낭만적인 감각을 동원해서 묘사하고 있다. 농민의 눈과 시인의 눈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누뤼알을 잘못 해석해서 비판받은 사람도 있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낸 장경렬 문학평론가는 정지용의 다른 시 겨울에 나오는 누뤼알을 유리알로 해석한 평론을 썼다. 그러자 황현산 평론가가 시어의 오독을 지적한 글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 장경렬 교수는 영문학을 전공해서 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수 있으나, 그렇게 따지면 황현산 평론가는 불문학을 전공했다. 장경렬 평론가가 황현산 평론가의 반박 글을 보았다면 우박을 맞은 듯 어이쿠!” 소리를 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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