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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엄씨는 명성황후가 오욕(汚辱) 살해된 직후 후궁(後宮)으로 봉작(封爵)
 김민수
 2013-11-10 14:44:08  |   조회: 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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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엄씨는 명성황후가 오욕(汚辱) 살해된 직후 후궁(後宮)으로 봉작(封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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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1930-5년 사료(史料)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편수(編修),감수(監修)한 총독부 일지인 고종실록, 순종실록 편찬위원(編纂委員)은 위원장은 시노다 지사쿠이며 감수위원(監修委員)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 쇼고, 나리타 세키나이이며 사료수집위원(史料 蒐集委員)은 기쿠치 겐조이며 서무위원(庶務委員)은 스에마쓰 구마히코, 시가 노부미쓰이며 회계위원(會計委員)은 사토 아키미치이며 감수 보조위원(監修 補助委員)은 총독부 이사관 에하라 젠쓰이이며 편찬 보조위원(編纂 補助委員)은 총독부 도경시 하마노 쇼타로, 총독부 군서기 미즈바시 후쿠히코이며 사료 수집 보조위원(史料 蒐集 補助委員)은 기타지마 고조이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사료(史料)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편수(編修),감수(監修)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실록은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대한국(1897- )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에 대한국(1897- ) 역사를 왜곡하고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중심으로 편수(編修),감수(監修)하여 편찬한 총독부 일지이므로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삭제하고 대한제국 황실 기사를 중심으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실록을 수정, 편집하였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으뜸 후궁(後宮) 순비(淳妃) 엄씨(嚴氏)는 8세 때에 궁녀가 되어 입궐하였고 경복궁의 나인으로 배치되었다.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었으며 1885년 31세에 고조 광무제의 승은(承恩)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의 명령을 받은 미야모토 다케타로가 지휘한 일본군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으로 침입하였으며 미야모토 다케타로가 지휘한 일본군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궁성문을 열어준 친일 훈련대 대대장의 협조를 받아 건청궁(乾淸宮) 곤녕합(坤寧閤)으로 침입하여 친일 상궁이 제보한 신체적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발가벗겨 칼로 몸에 상처를 내고 엽기적으로 욕보이는 오욕(汚辱)하며 살해하고 시신을 녹원(鹿苑)에서 불태웠다.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러시아공사관 이어를 결정하게 되었다.1895년 일본군국주의의 명성황후 살해 만행 직후 상궁 엄씨는 1896년 고조 광무제를 모시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하였으며 1897년 영친왕 은(垠)을 낳고 종1품 후궁(後宮) 귀인에 봉작(封爵)되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 건국과 함께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되었으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국장을 치르고 청량리에 장례되었다가 경기도 남양주 금곡 홍릉(洪陵)으로 천장(遷葬)되었다.귀인 엄씨는 1900년 8월 3일 정1품 후궁(後宮) 순빈(淳嬪)으로 진봉되었다. 1901년 9월 14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국의 비(妃),빈(嬪)은 후궁의 벼슬인 후궁지관(後宮之官)이라고 하였다.10월 14일 고조 광무제는 후궁 순빈(淳嬪) 엄씨(嚴氏)를 으뜸 후궁(後宮) 순비(淳妃)로 책봉(冊封)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이르기를 “순빈(淳嬪) 엄씨는 천품이 순후하고 처신이 조심스러워 실로 훌륭하다는 평판이 많았으니 응당 표창해야 할 것이다. 이에 옛 법을 상고하여 칭호를 높인다. 이제 정사(正使)인 완평군(完平君)이승응(李昇應)과 부사(副使)인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 서상조(徐相祖)를 보내어 너를 후궁(後宮) 순비(淳妃)로 봉하라고 명하니 유도(柔道)를 체득하여 따라 받들고 법도를 지킨다면 훌륭하지 않겠는가?”하였다. 내전(內殿)에서 고조 광무제의 으뜸 후궁 순비(淳妃)가 조현례(朝見禮)를 행하였다.


1902년 10월 13일 내부 대신(內部 大臣) 이건하(李乾夏)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게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온갖 법률(法律)과 제도(制度)인 백도(百度)가 새롭게 정치가 혁신되는 유신(維新)되어 불비한 것이 없으며 궁중(宮中) 후궁(後宮)의 규율(規律)에 대한 곤법(壼法)은 급하지 않은 미황(未遑)하였습니다. 천자(天子)의 나라 천자국(天子國)에는 황후(皇后)가 있고 후궁(後宮) 정1품 빈 위에 비(妃),귀비가 있으며 제후국(諸侯國)은 왕후를 다시 책봉하는 재빙(再聘)할 수 있지만 천자국(天子國)은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재빙(再聘)할 수 없는 예법이 있습니다. 천자국(天子國)인 우리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9)은 명국(明國)과 계통이 같은 통서(統緖)의 나라이니 명국 고사(故事)의 예에 따라 후궁(後宮) 순비(淳妃)를 후궁(後宮) 귀비(貴妃)로 높이소서” 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의 후궁인 귀비 엄씨는 1895년 일본군,궁성문을 열어주고 안내한 친일 훈련대 대대장,명성황후의 신체적 특징을 제보한 친일 상궁에 의해 명성황후가 엽기적으로 욕보이는 오욕,살해된 후 정5품 상궁에서 1897년 종1품 귀인,1900년 정1품 순빈,1901년 순비로 승승장구하며 명헌태후가 붕서한 1903년 황제국 으뜸 후궁인 귀비(1901년 9월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국의 비(妃),빈(嬪)은 후궁의 벼슬인 후궁지관(後宮之官)이라고 하였다)까지 진봉되었고 일본이 러일전쟁을 개전한 1904년 대한제국 유일한 황태자비 민씨가 훙서하였다.러일전쟁을 승리한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불법 늑결,1906년 2월 일본군국주의 통감부(1906-1910) 설치,이토 히로부미 통감 취임(1906년 이후 대한제국 최고 통치자) 이후에 의친왕의 어머니 귀인 장씨(총독부 1930-5년 실록 편찬 시 황태제 후보인 의친왕의 어머니 졸서 일시,원인 기록 삭제)가 졸서(卒逝:일본 통감이 황태자 대리청정을 강요한 1906년 4월 이후 대한제국 불법 병탄 위해 전략적 숙청)하였다.



1906년 3월 일본군국주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여 통감통치(1906-1910)를 시작하고 황태자(이척) 대리청정을 강요하였다. 대한제국은 천자국으로서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10월 24일 종2품 노영경(盧泳敬) 등이 상소를 올려, ‘고조 광무제의 후궁(後宮) 귀비(貴妃) 엄씨(嚴氏)를 황후(皇后)로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재빙(再聘)하는 대례(大禮)를 속히 거행하소서.’라고 청하니,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비답하기를, “더없이 중대한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재빙(再聘)하는 대례(大禮)를 갑자기 의논할 수 없다.”하였다. 종2품 원세순(元世洵) 등이 상소를 올려, ‘고조 광무제의 후궁(後宮) 귀비(貴妃) 엄씨(嚴氏)를 황후로 높이는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재빙(再聘)하는 대례(大禮)를 날을 받아 거행하소서.’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사체가 중대한데 어떻게 갑자기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재빙(再聘)하는 대례(大禮)를 의논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전 의관(議官) 장석신(張錫藎) 등이 상소를 올려, ‘고조 광무제의 후궁(後宮) 귀비(貴妃) 엄씨(嚴氏)를 황후로 승격시키는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재빙(再聘)하는 대례(大禮)를 거행하소서.’라고 청하니,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비답하기를, “황제(皇帝)가 다시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재빙(再聘)하는 대례(大禮)는 국가의 큰 예식인 만큼 이처럼 갑자기 청할 것이 아니다.”하였다. 고조 광무제의 으뜸 후궁(後宮) 귀비(貴妃) 엄씨는 일본군국주의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11월 18일 을사늑약을 불법 늑결하고 대한제국 독점적 지배권을 가지면서 득세한 대신들과 합세하여 1907년 이토 통감이 황태자(1919년 1월 황제위에 등극한 순종 융희제) 이척의 대한제국 황태자궁인 창덕궁에서의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정미늑약 불법 늑결 직후 후궁(後宮) 귀비(貴妃) 엄씨(嚴氏)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청탁하여 아들 이은을 합법적인 황태제(皇太弟:선위 아닌 대리청정이며 황제의 동생이 황제위를 계승하면 황태제로 책봉) 책봉도 아닌 불법적인 황태자(황제 등극 아닌 대리청정이며 황제 등극 후 바로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는다.)로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다. 1911년 7월 고조 광무제의 후궁(後宮) 귀비(貴妃) 엄씨(嚴氏)가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졸(卒)하였고 일본군국주의 총독이 으뜸 후궁 황귀비로 임명하였다.조선국 국왕을 생산한 사친의 묘궁인 6궁에서 조선국 국왕을 생산한 사친이 아닌 고조 광무제의 으뜸 후궁 귀비 엄씨의 사당을 이건하고 영휘원을 으뜸 후궁(後宮) 엄씨 묘로 개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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