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 고물상의 시계
독자수필--- 고물상의 시계
  • 뉴스서천
  • 승인 2002.07.31 00:00
  • 호수 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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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소리 없이 스르르 미끄러져 간다. 옆에 있는 기차가 가는 줄 알고 있다가 역 구내를 벗어난 뒤 내가 탄 차가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시계를 보며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을 가늠한다.
오후 6시가 넘었는데도 해는 아직 노기가 가시지 않았다. 차창 밖에는 여름이 암녹색으로 마디마디에 약 차 오른다. 전신주, 건물, 산과 나무들이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어제 지나갈 때 보았던 고물상 몇 곳도 휙휙 지나가 버린다. 멀리 있는 사물들은 한동안 기차를 따라오다가 지쳐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 버린다.
찻길 옆이나 철교 밑에는 유독 고물을 수집해 놓은 장소가 많다. 기차가 쾌속으로 질주하는 소음 때문에 주거지로는 적당하지 못하여 땅 값이 싼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철로 변에는 도로 사정도 좋은 편이니 수집과 운반이 편리한 이점도 있으리라. 요즈음은 왜 그리 버릴 것들이 많은지, 그 곳에는 늘 재활용품으로 넘쳐난다. 나가고 든 흔적 없이 늘 고만큼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재생 공장으로 반출하는 양도 시원치 않은 모양이다.
고물상은 철길 주변의 임시 거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스산한 살림살이를 대변한다. 그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에게 길을 내주고 한 발짝 비켜서서 끌어들이고 모아둔 재활용품 속에서 한 톨의 가능성과 꿈을 찾는다. 그 꿈을 싣고 떠나가기 위해서 드난살이 같은 살림을 철길 주변에서 벌려 놓은 것은 아닐까?
익산역 조금 못 미친 곳 철길 바로 옆에 고물 수집소가 있다. 나는 오며 가며 그 집의 물건들을 눈여겨본다. 철조망으로 얼기설기 제 영역을 긋고, 그 안에 질서 없이 폐품들을 그득 쌓아 놓았다. 그 집 역시 지은 지 오래 된 삼칸 집이다. 처마를 덧대어 내고 지붕을 함석으로 개량하여 페인트칠을 한 모양인데, 지금은 페인트의 색은 찾아볼 수 없다. 벌겋게 녹이 슨 굴곡 마디에서 그 집이 겪은 풍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철판 마냥 두툼하게 산화된 모습이 오히려 미덥게 보인다.
종이박스는 제가 품었던 물건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진 채 접히고 구겨져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자신을 비끌어 맨 운명의 끈에 매달려 하염없이 흐느적거리며 울부짖는다. 가슴을 에이는 사랑으로 누군가를 울렸을 소설책은 모든 기억을 가슴에 첩첩이 접어둔 채 나뒹군다. 삶의 도정은 질주하느라 지칠 데로 지친 타이어는 마디마디에 관절통을 앓으며 널브러져 있다. 세 발 자전거는 바퀴 한 짝이 빠져나간 채 녹 슨 드럼통에 기대어 서서 지난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흠뻑 젖어 마디마디에 서린 아픔으로 눈물을 흘린다. 눈이 오면 지저분한 잡동사니들은 하얗게 단장하고, 추하게 변해 가는 제 몰골을 잠시 잊는다.
그 고물상 벽에 시계가 걸려 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둥그런 얼굴만 있는 큰 시계다. 주먹만한 아라비아 숫자 12개는 지나가는 열차 안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무심히 보았는데 최근에 그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장이 난 시계다.
고장난 시계가 왜 거기에 걸려 있을까? 주인이 고쳐 쓰려고 고물 속에서 가려내어 걸어두고 깜박 잊은 것인지, 건전지만 갈아주면 될 텐데, 폐품을 닮아 가는 주인이 잊고 저렇게 우뚝 세워 놓았는지 모르겠다. 혹시 시계가 제 스스로 서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 곳의 모든 물건들이 과거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헌데 저 혼자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반칙을 한 것 같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인지도, 시계는 흐르는 시간을 따라 가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고, 그냥 거기 서서 고물상의 풍경이 되어 있다.
그 고물상의 시계는 언제나 8시35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제 오후 3시에 그 옆을 지날 때도, 오늘 오후 6시경 그 옆을 통과할 때도 변함없이 같은 시간에 바늘이 고정되어 있다. 폐품들과 같이 과거 어느 때의 8시35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쭈그러진 양은그릇은 가난한 식솔들이 찬밥 한덩이를 비벼 함께 먹던 늦은 저녁 8시35분을 기억하고 있을 지 모른다. 세 발 자전거는 아장아장 걷는 첫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대견하게 웃는 젊은 아버지의 일요일 아침 8시35분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시계가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서 버려서, 그 곳의 물건들도 지금보다는 훨씬 좋았던 시절의 8시35분에서 기억을 멈추었을 것이다.
기차가 달린다. 앞에 있는 사물을 끌어 당겨서 뒤로 밀어버리고, 또 새로운 물체를 끌어다가 뒤로 밀어버리는 그 힘으로 자꾸만 앞으로 달려간다. 그 곳의 시계는 비록 멈추어 있지만 세상의 모든 시계들이 미래의 시간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에.
문영/ 서천읍 삼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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